[윤세영의 따뜻한 동행]바람 풍, 바담 풍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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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꼭 지켜야 하는 모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그러나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한 사람이라도 지각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싶어 남편이 먼저 들어가고 내가 운전석에 앉았다. 주변을 한참 돌고난 뒤 운 좋게 한 자리 발견, 주차를 하고서야 남편이 자동차 열쇠를 갖고 내렸음을 알았다. 열쇠를 꽂지 않고 운전하는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남편은 차에서 내릴 때 종종 열쇠를 넘겨주지 않고 그냥 가버리곤 한다.

그런 남편인지라 나는 늘 핸드백에 보조 열쇠를 넣고 다녀서 낭패를 면하긴 하지만 그날따라 남편의 잘못된 습관을 지적함과 아울러 생색을 좀 내고 싶어 말문을 열었다. “아까 또 열쇠를 안 주고 내렸잖아. 내가 열쇠를 따로 갖고 다니기에 망정이지, 왜 만날 그냥 내려?”

그러나 자신의 부주의함과 나의 준비성에 기죽어 작아질 줄 알았던 남편이 뜻밖에도 “그럼 당신이 열쇠 주고 가라고 말했으면 되잖아?”라고 반격하는 게 아닌가. 듣고 보니 과히 틀린 말은 아닌데 슬그머니 기분이 언짢아진다. 내리는 사람이 열쇠를 주고 가야 한다고만 생각했을 뿐, 운전을 교대받은 사람이 챙길 수도 있다는 생각까진 못했는데 지적을 받고 보니 기분이 별로다.

그 앙금이 남아 있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안방 화장실에 들어가니 수도꼭지가 제대로 잠겨 있지 않아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여보, 이리 좀 와봐”라고 부르려던 순간,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내가 그랬을 수도?’라는 생각이 퍼뜩 지나갔다. 그리고 ‘내가 그랬다면…’이라고 가정해 보니까 ‘가끔은 그런 실수를 할 수도 있는 일이지’라는 너그러운 맘으로 확 바뀐다.

얼마 전에 지인에게서 들은 손녀 이야기가 떠올랐다.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게 엄마 아빠가 교육적 견지에서 잘못을 지적하며 훈계하자 아이가 이렇게 대꾸하더라고 했다.

“너희들도 다 그러잖아.”

단순명료한 그 한마디에 부모는 할 말을 잊었다고 한다. 맞다. 우리도 다 그렇게 한다. 종종 우리도 ‘바람 풍’을 ‘바담 풍’이라고 하면서 타인의 ‘바담 풍’에는 가차 없이 ‘지적질’을 해댄다. 자신은 결단코 그런 적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나도 때때로 실수를 하면서 상대가 ‘바람 풍’이라고 하지 못한다고 지적을 해댄다면 그건 불공평한 일이다. 아무튼 유비무환, 오늘 아침에도 나는 말없이 보조 열쇠를 핸드백에 챙겨 넣었다.

윤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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