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우리 안의 난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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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오피니언팀장
이진 오피니언팀장
한곳을 바라보고 나아가던 유럽이 각기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다. 봇물 터진 듯 밀려드는 불청객들 탓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인파에 유럽 주요국들이 화들짝 놀라 빗장을 닫아걸었다. 열차 운행을 일시 중단하거나 군경을 배치해 가로막고 나섰다. 높이가 4m나 되는 담장을 쌓아 발길을 묶는 국가도 있다. 국경 없이 넘나들던 ‘하나의 유럽’이 맞나 싶을 정도다. 물론 이는 시리아나 리비아에서 온 난민을 겨냥한 조치들이다. 난민은 지옥으로 변한 조국을 탈출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약속의 땅’은 아직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뿐이다. 지치고 허기진 몸에서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쉴 곳을 찾고 또 찾아야 하는 신세다.

기댈 곳 없이 떠돌아야 하는 난민은 우리 가까이에도 있다. ‘전세난민’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전세금이 다락같이 올라 도심에서 변두리로, 변두리에서 다른 시도로 밀려갈 수밖에 없으니 난민이란 말이 그렇게 과장은 아니다. ‘전세난민’이라는 표현은 2010년경부터 언론에 등장했다. 벌써 6년째 계속되는, 아니 더 심해지는 현상이 됐다. ‘취업난민’ 역시 ‘전세난민’ 못지않은 좌절감을 느끼는 이들이다. 자신이 자란 집이나 고향을 애써 피하려 한다. 언젠가 자랑스럽게 부모님을 뵙기 위해 하루하루 온 힘을 쏟는다. 그래도 유랑민 처지에서 벗어나는 이는 많지 않다.

김형률 유고집을 읽으면서 기막힌 난민은 따로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형률의 모친은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다섯 살로 일본 히로시마에 있었다. 김형률은 1970년 쌍둥이 중 형으로 태어났다. 동생은 1년 6개월 만에 폐렴으로 숨졌고 그도 고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병치레가 잦았다. 스물다섯 살이 돼서야 ‘선천성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으로 면역력이 갓난아이처럼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폐와 기관지에 병을 달고 산 이유였다. 모친의 피폭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의사에게서 들었다. 지은 죄도 없건만 천형(天刑)을 받은 것이다.

김형률은 2002년 ‘원폭 2세’라고 자신을 세상에 드러냈다. 이어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모아 ‘원폭 2세 환우회’를 만들었다. 성치 않은 몸에 피를 토하면서도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동분서주했다. 일본에도 건너가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이때는 일본 정부가 한인 피폭 1세들조차 제대로 지원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김형률은 1세들로부터 외면과 냉대를 받기까지 했다. 결국 그는 ‘원폭피해자특별법’ 제정 청원을 하던 2005년 과로로 35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가 떠난 지 10년 만인 올해 일본 최고재판소는 한국 거주 피폭자들에게도 치료비를 전액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세들은 피폭 70년 만에 일본 거주 피해자들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김형률 같은 2세 환자들은 여전히 의지할 곳이 없다. 정부는 2세의 정확한 규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한일 정부는 2세들까지 지원할 수는 없다고 여러 이유를 내세운다. 청구권 문제는 끝났다, 2세가 아픈 이유가 유전 탓이라고 볼 수 없다는 식이다. 이런 거부의 논리에 막혀 포기할 수는 없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교수가 얼마 전 본보를 통해 제안한 ‘한일미래재단’(가칭) 설립처럼 제3의 길은 찾으면 나온다.

유럽 각국 정부와는 달리 시민사회는 난민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다. 난민도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리라. 무엇보다 사람을 중히 여기라는 깨우침이 모두에게 절실하다. 생전의 김형률은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작은 소망을 꼭 지키고 싶다.’

이진 오피니언팀장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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