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의 정치해부학]누가 ‘반쪽 대통령’을 만드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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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논설위원
박성원 논설위원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지난달 미국 방문 기간에 “한국의 대통령은 미국과 달리 예산안 편성권과 법안제출권까지 갖고 있어 막강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한 전직 주한 미대사가 다가와 “더 있죠. 검찰 경찰 국세청까지 (주무를 수) 있잖아요”라고 귀엣말을 했다.

과거 정부에서 청와대 핵심참모를 지낸 한 인사는 “대통령이 정치인에게 직접 전화해서 ‘이건 정말 이러이러하니 좀 도와 달라’고 하고, 직접 불러서 손 한번 잡고 ‘내가 무슨 욕심이 있겠느냐’고 호소하면 야당 사람이라도 나 몰라라 하기 어려운 게 우리 현실”이라고 했다. 그게 ‘대통령의 힘’이다.

족쇄 채워진 여당 원내대표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정부의 시행령에 대해 국회의 수정요구권을 강화한 국회법 개정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헌법상 정당한 대통령의 권한이자 의무에 해당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정치권이 정부 비판으로 발목만 잡고 있다”며 국회를 힐난하고 “여당 원내사령탑도 경제 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라고 질타한 것을 보며 ‘그럼 대통령은 할 일을 다했는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66만 명의 일자리 창출이 기대된다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에 대해 야당이 ‘의료 영리화 음모’라며 반대해도 의석 5분의 3 이상이 없는 한 국회에서 통과시킬 수 없다. 이른바 국회선진화법 때문이다. 이 법안을 통과시킨 주역이 유승민 원내대표인가? 아니다. 2012년 5월 새누리당 원내대표였던 황우여 현 사회부총리가 앞장서고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적극 지원했다.

유 원내대표가 공무원연금 개혁안 협상을 하다가 난데없이 국민연금 인상이라는 혹을 붙여 오고, ‘위헌적인’ 국회법 개정안에 덜컥 합의해준 건 ‘협상력 부족’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하지만 그가 “훈장을 받을 줄 알았는데 꿀밤만 맞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 건 국회선진화법이라는 족쇄를 채워놓고 ‘법안 처리’라는 뜀틀을 뛰어넘으라는 식의 주문에 대한 항변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면 박 대통령은 여야 지도부와 만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마땅하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7월 15일 김무성 대표 등 신임 지도부와의 상견례 자리에서 “야당이 정부를 공격할 순 있어도 여당이 공격하면 정부는 일할 힘을 잃는다. 그리 하면 내가 여당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국회로 돌아온 국회법 개정안을 폐기해버리면 임기 중반 대통령 탈당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막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대통령 한마디에 납죽 엎드려버린 ‘청와대 출장소’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중재안 살린 출구전략 필요

지금은 대통령이 여당 지도부를 불러 재떨이를 던지며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재원 조달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야단칠 수 있었던 박정희 시대와 다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3년 1월 택시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뒤 대체법안을 제출해 관철시킨 일이 있다. 박 대통령은 정의화 국회의장이 제안했던 중재안 가운데 누락된 ‘검토하여’라는 대목을 되살려 위헌 소지를 최소화하는 대체입법을 여당과 국회에 설득할 필요가 있다. 거부권 행사에 따른 출구전략을 정치권과 함께 모색할 것인지, 힘으로 정치권을 제압하려다 자칫 ‘반쪽 대통령’으로 남을 것인지는 박 대통령의 선택에 달려 있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
#반쪽 대통령#족쇄#여당#거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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