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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王 “간무천황 생모가 무령왕 후손”… 백제와의 인연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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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王 “간무천황 생모가 무령왕 후손”… 백제와의 인연 인정

하정민기자 입력 2015-06-25 03:00수정 2015-06-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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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8>日왕실에 흐르는 백제인의 피
일본 교토 시 오에 마을 이세코 산에 있는 고야신립 황후의 능. 울창한 숲 한가운데 있는 데다 마을 입구나 교토 관광책자 등에 능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과 설명이 없어 찾아가기가 상당히 어렵다(위 사진). 능 앞에 선 이노우에 미쓰오 교토산업대 고대사연구소장(아래 사진 왼쪽)과 나카노 아키라 아사히신문 기자. 교토=하정민 기자 dew@donga.com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몇 달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자리에서 폭탄 발언을 한다.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50대 천황·737∼806·재위 781∼806년)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월드컵 공동 개최라는 한일 간의 대형 축제를 앞두고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한 것이었지만 일본 내에서 금기로 통하던 천황가(家)의 백제 유래설을 천황 스스로가 깼다는 점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천황가가 백제 왕실과 밀접했다는 주장은 일부 한일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천황 스스로가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는 점, 8세기 후반에서 9세기에 걸쳐 재위했던 간무(桓武) 천황과 어머니를 구체적으로 거론했다는 점, 간무 천황 어머니가 무령왕 자손이었다는 ‘속일본기’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밝힌 점 등은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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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 천황 발언에 대한 후폭풍은 별로 없었다. 일본에서는 아사히신문만이 발언을 보도했고 나머지는 모두 잠잠했다. 천황계는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전해져 내려와 일본에서 자생했다는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젖어 있던 우익들이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발언이므로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일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뒤인 2004년 8월 3일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5촌 당숙이자 일본 왕족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씨가 수행원과 친척 2명만 데리고 무령왕릉(충남 공주)을 찾아 참배하고 간 사실이 이튿날 공주시의 발표로 알려졌다. 이들을 안내한 이석호 전 부여문화원장은 당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백제 무령왕의 후손인 일본 왕족들의 무령왕릉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크다. 이번 참배는 일본 내 여론을 의식해 비공식적으로 이뤄졌다”고 전했다.

이렇듯 일본 천황가와 백제의 인연은 단순한 전설이나 일부의 주장이 아니라 일본 왕실 스스로가 인정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 한일 교류의 역사가 그렇게 간단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과 일본이 더 가까워지려면 보다 오랜 역사로부터 비롯된 깊은 인연에 주목할 이유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간무 천황의 생모 고야신립

그렇다면 아키히토 일왕이 언급한 간무 천황의 생모는 누구일까. 또 무령왕과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속일본기’(789년)는 이렇게 전한다.

‘황태후의 성은 화씨(和氏)이고 이름은 신립(新笠)이다. 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다. 황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을 드러냈다. 고닌(光仁) 천황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하여 맞아들였다. …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

여기서 언급된 고닌 천황은 간무 천황의 아버지이다. 그의 부인이자 간무 천황의 생모는 고야신립(高野新笠·다카노노 니가사)이다. 기자는 일본에 있는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4월 말 교토에 있는 무덤을 찾아갔다. 능은 교토 시내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40분가량 떨어진 오에(大枝) 마을 이세코(伊勢講) 산 중턱에 있었다.

계절상 봄이었지만 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는 때 이른 더위가 한창이던 4월 22일 오후 이곳으로 기자를 안내한 사람은 고대 한일 교류 연구에서 일본 내 최고 권위자로 불리는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토산업대 고대사연구소장(75)이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한일 고대문화 교류 흔적을 취재해 연재할 것이라는 사실에 흥미를 가진 아사히신문 오사카 지국 사회부 나카노 아키라 기자(44)도 동행했다.

산 입구에 있는 계단 몇 개를 오르자 빽빽한 대나무 숲이 일행을 에워쌌다. 그 광경이 장관이어서 굳이 대나무로 유명한 교토 근교 관광지 아라시야마를 갈 필요가 없다고 느낄 정도였다. 5분쯤 산을 더 오르자 무덤이 나타났다.

고야신립이 묻힌 능은 둥근 봉분이 밖으로 드러나 있는 한국식과는 많이 달랐다. 능 바로 앞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한 작은 철문이 있고 능 중앙에 돌로 된 도리이(鳥居·두 개의 나무 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을 나무 가로대로 연결한 문. 흔히 일본 신사 정문에 서 있다) 형태의 구조물과 그 양측의 작은 석등 2개를 다시 한 번 철문으로 감싼 일종의 이중 잠금 구조였다.

두 철문 사이의 공간에는 오른편에 비석이, 왼편에는 제법 큰 기와지붕 아래 걸린 나무 편액이 있었다. 비석에는 ‘光仁天皇皇后高野新笠大枝陵(광인천황황후고야신립대지릉)’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광인천황’이란 남편 고닌 천황을 뜻한다. 편액에는 ‘天高知日之子姬尊(천고지일지자희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뜻으로 모친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아들 간무 천황이 어머니 사후 직접 내린 시호였다.

이노우에 소장은 “시호에 ‘태양 일(日)’자를 쓰는 것은 고구려 시조이자 태양왕 후손인 주몽의 후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간무 천황도 어머니가 백제계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기에 이런 시호를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신사 입구에서 자주 보던 도리이 형태의 문이 무덤 안에 있다는 것도 특이했다. 이에 대해 이노우에 소장은 “일본인들은 도리이를 현세와 내세를 구분 짓는 상징물로 여긴다. 즉, 도리이를 통과한다는 것은 혼탁한 현세를 건너 신성한 내세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그만큼 이 무덤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취재를 거절한 히라노 신사

위패 모신 신사는 취재 거절 고야신립의 위패를 모신 히라노신사. 3월 초부터 신사의 역사와 관련한 취재 요청을 했으나 “우리는 한국과 관련이 없다”며 거절했다. 교토=하정민 기자 dew@donga.com
교토에는 또 고야신립의 위패를 모신 ‘히라노(平野)신사’가 있다. 나라에서 헤이안(교토의 옛 이름)으로 천도를 단행한 간무 천황이 수도를 옮기면서(794년) 어머니의 혼이 담긴 위패까지 함께 옮겨 신사를 만들었다. 이때 그는 어머니에게 태황태후(太皇太后)라는 최고의 지위를 내린다.

히라노신사는 서울 광화문에 빗댈 수 있는 교토 기차역에서 시내버스로 30분 정도 북쪽에 있었다. 교토 시내 여러 신사 중 벚꽃이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곳이다.

특히 65대 가잔(花山·968∼1008) 천황은 이곳에서 직접 벚꽃 식수를 하기도 했다. 3월 말∼4월 초 벚꽃 절정기에는 신사 안에 전통상품, 기념품, 각종 먹거리 등을 파는 노천 가게가 대거 들어선다. 흐드러진 벚꽃 아래 한국식 포장마차와 유사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이를 찾는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기자가 찾은 때에는 대부분 벚꽃이 진 상태였다. 벚꽃도 관광객도 거의 없는 신사는 입구에서부터 다소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신사 본관이 나타난다. 구도신(久度神), 후루아키신(古開神), 이마키신(今木神), 히메신(比賣神)을 모시는 신전이 있는데 이 중 히메신이 바로 고야신립을 모신 것이다.

기자는 3월 초부터 히라노신사 측에 백제와의 인연과 관련한 취재를 요청했으나 “우리 신사가 백제 또는 한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따라서 취재에 응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국과의 관련성을 묻지 않을 테니 그냥 신사의 유래와 현재에 대한 질문 몇 개만 받아 달라는 요청도 거부했다.

신사를 걸어 나오는 뒷맛이 썼다.

:: 속일본기(續日本紀) ::


697년부터 791년까지 94년간의 역사를 40권 분량으로 다룬 책. 일본서기(720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졌으며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필수 자료로 평가받는다.

교토=하정민 기자 dew@donga.com

※9회는 ‘백제 여인과 천황의 사랑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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