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기만 하다 걸으니 인생이 보입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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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 전도사’ 변신한 히말라야 14좌 완등 엄홍길 대장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20일 히말라야 셰르파 마을로 유명한 네팔의 남체바자르 인근에서 트레킹 도중 환하게 웃고있다. 엄 대장 뒤쪽으로 눈 덮인 콩데(해발 6187m)의 봉우리가 보인다. 남체바자르=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20일 히말라야 셰르파 마을로 유명한 네팔의 남체바자르 인근에서 트레킹 도중 환하게 웃고있다. 엄 대장 뒤쪽으로 눈 덮인 콩데(해발 6187m)의 봉우리가 보인다. 남체바자르=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세계적인 산악인 엄홍길 대장(54·밀레 기술고문)은 요즘 따뜻한 물을 자주 찾는다. 해외로, 국내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감기에 걸렸다. 따뜻한 물을 마시며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다.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엄 대장은 그동안 높은 산을 자주 올랐다. 그러나 요즘은 상대적으로 평탄한 길을 걷는 트레킹에 푹 빠져 있다. 수직 운동에서 수평 운동으로 바뀐 셈이다.

엄 대장은 14일부터 22일까지 또다시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다. 네팔 카트만두를 출발해 루클라, 남체바자르 등의 트레킹 코스를 돌고 왔다. 엄 대장은 다음 달부터 동아일보와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가 함께 추진하는 대한민국 숲길 트레킹에도 함께 나선다. 트레킹을 즐기면서 예전보다는 좀 더 많은 여유를 찾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높은 곳을 목표로 오르면 머리 아픈 강박관념이 생겨요. 게다가 높은 산을 오르다 보면 무리수, 고통, 후회, 극한 상황은 물론이고 때로는 죽음이 밀려들잖아요. 그런데 평탄한 길을 걸으니 걱정할 건 없고 오로지 자연과 교감하고, 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더군요.”

한창 높은 산을 찾아다닐 때, 엄 대장은 산에 가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정상에 서 봤습니까?”라고 되묻곤 했다. 최근의 엄 대장에게 트레킹에 빠진 이유를 물으니 “걸어보면서 인생을 보셨습니까?”라는 질문이 되돌아왔다.

엄 대장은 걷기를 통해 인생의 보너스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걸으면서 꽃과 나무들의 각도까지 눈에 들어오게 됐다고 한다.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 미래도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족의 애틋함도 더 느끼게 됐다고 했다. 오랫동안 고산(高山) 등반을 하면서 죽음의 위기, 육체적 고통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왔던 자신에게 트레킹을 통한 천천히 걷기는 세상이 준 선물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아! 너무 행복해’라고 외쳐요.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고통을 견뎌내느라 몸과 마음이 고생을 했는데, 하늘이 이제 쉬라고 보너스를 준 것 같아요.”

엄 대장의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보다 가늘다. 오른쪽 발목은 굽혀지지 않는다. 요즘 엄 대장과 함께 트레킹을 하는 이들은 자주 이 오른쪽 다리에 대해 묻는다. 엄 대장은 1998년 안나푸르나 제1봉(해발 8091m)에 4번째 도전할 당시 오른쪽 무릎부터 발목까지 세 군데가 부러져 대수술을 받았다. 엄 대장은 “7600m 지점을 오르던 때였다. 추락하는 셰르파(히말라야 고산지대 가이드)를 살리려다 내 발목에 줄이 감겼고 발목이 180도 돌아간 상태로 10여 m를 추락했다”고 회상했다. 다행히 셰르파는 목숨을 건졌지만 수술을 맡은 의사가 엄 대장에게 다시는 산에 오르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수술 10개월 만에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했다. 4전 5기였다. 정상에서 펑펑 울었다.

엄 대장은 함께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지칠 때면 이 오른쪽 다리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다. “조금 경사진 길을 걸을 때 저는 발목이 잘 안 돌아가서 발 앞쪽만 사용해 걸어가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대단한 기술을 본 것처럼 따라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아픈 나도 길을 걷는다’며 다친 다리와 발목을 보여줘요. 산악인 엄홍길도 똑같이 상처를 입는 사람이라는 건데, 그 순간 저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이 없어지더라고요.”

엄 대장은 동아일보와 밀레의 숲길 트레킹 행사를 통해 “자연은 인간의 생명줄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고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산악 대장’에서 ‘힐링 대장’이 되고자 하는 엄 대장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엄홍길#트레킹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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