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김정은의 와인 사랑과 금주령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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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북한을 방문한 김정일의 전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씨가 김정은에게 와인을 따르고 있다.
2012년 7월 북한을 방문한 김정일의 전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씨가 김정은에게 와인을 따르고 있다.
최근 북한 고위 간부들 속에서 와인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코냑을 좋아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김정은은 와인을 즐긴다는 소문 때문이다.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 씨는 지난해 4월 “김정은은 보르도산 와인을 꿀꺽꿀꺽 마시고 카르티에 멘솔 담배를 피우며 할리우드 스타 장클로드 반담의 근육질 몸매를 갖길 원했다”고 말했다. 후지모토 씨가 북한을 탈출한 것이 2001년이었으니 당시 김정은의 나이는 많아야 열일곱 살 정도였을 것이다. 막 스위스에서 돌아왔을 때쯤 되지 않을까 싶다.

김정일의 측근 관리용 비밀파티 부활

한 북한 고위 소식통은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이 30, 40대에 측근을 관리하기 위해 자주 열던 한밤의 비밀 파티를 다시 부활시켰다고 전했다. 다만 측근들의 연령은 훨씬 높아졌다. 김정일의 비밀 파티에는 형뻘 되는 측근들이 주로 참가했는데 김정은의 파티 참가자 대다수는 아버지뻘, 많으면 할아버지뻘이라는 것이다.

후지모토 씨가 2003년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을 내기 전까진 코냑을 들이켜며 한국 노래를 부르고 심지어 여성들을 발가벗기고 함께 춤을 추는 김정일의 파티는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한번 파티 멤버가 되면 숙청되는 일이 거의 없고, 설령 쫓겨나도 다시 복권시켜 줄 것이란 믿음이 있어 입들을 굳게 다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 김정은의 파티는 벌써부터 평양의 권력가에 은밀히 퍼지고 있다. 파티 멤버였다가 지금은 쫓겨난 누군가가 주변에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한 것이 퍼지고 있는 것 같다. 워낙 많은 사람이 숙청됐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소문에 따르면 김정은은 술에 취하면 사람을 앞에 불러다 욕설을 퍼붓고 상대방 몸까지 툭툭 치는 버릇이 있어 참가자들이 모멸감을 느낀다고 한다. 기쁨조까지 불러 파티를 즐기는 오빠의 모습에 화가 난 여동생 김여정이 “아버지처럼 살지 마”라고 소리쳤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김정은의 고모인 김경희도 오빠 김정일에겐 서슴없이 충고했다고 알려졌지만 모든 권력을 움켜쥔 독재자가 금욕을 택한 경우는 동서고금에 거의 없다.

北 수입품중 와인 등 주류 비중 증가 최대

은밀히 퍼지는 것은 ‘파티’뿐만이 아니다. 김정은이 와인 마니아란 소문이 퍼지면서 간부들이 선호하는 술도 김정일 시대 코냑에서 와인으로 ‘권력 이동’을 했다고 한다. 와인을 꺼내놓고 해당 와인의 ‘스토리’ 정도는 읊어줘야 신권력층이라 인정받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북한에 열린 ‘와인 시대’는 무역 통계가 증명해 준다. 통일부에 따르면 2012년 북한의 수입품에서 가장 크게 늘어난 항목이 와인 등 주류와 음료로 1년 동안 무려 3011만 달러어치나 사 갔다. 북한 주민의 주식인 옥수수를 20만 t 가까이 살 수 있는 금액이다. 불가리아의 경우 와인이 대북 수출 1위 품목으로 등극했다. 지난해엔 14달러짜리 2008년산 루빈 와인 두 컨테이너가 북한으로 수출됐다. 아마도 김정은의 취향을 따라가려는 간부들에게 배달됐을 것이다.

김정은은 프랑스산 고급 와인을 마시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의 와이너리(와인 양조장) ‘메종 미셸 피카르’의 프랑신 피카르 대표는 2010년 방한해 “15년 전 북한 관리가 헬기를 타고 와 여러 와이너리를 둘러보고 간 뒤부터 북한은 매년 고급 와인을 수백 병씩 사갔다”고 말했다. 후지모토 씨는 김정일의 술 창고에 와인이 1만 병이나 소장돼 있다고 증언했다. 김정은은 이 술 창고도 상속받았을 것이다.

고급 와인 맛에 푹 빠진 김정은은 정작 인민은 값싼 술조차 마시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올 초 갑자기 전국에 금주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금주령 어긴 軍지휘관 즉결 처형

몇 달 전 이 금주령을 어긴 한 군부대 지휘관 몇 명이 김정은에게 걸려 즉결 처형됐다는 말까지 들린다. 김정은이 지시 집행 상황을 요해(了解)하기 위해 부대를 불시에 방문했는데 지휘관들이 지시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데다 하필이면 그때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9월 김정은은 미림승마장 타일이 제대로 시공되지 않았다고 시공책임자를 처형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식의 즉결처형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지시가 집행되지 않으면 무시당한다고 분노하고, 자신에 대한 외부의 보도에 예민해하는 현상은 장성택 처형 이후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

또 현장 시찰이 늘수록 상호 모순이 되는 즉흥 지시도 늘고 있다. 가령 인민들이 장사를 하느라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보고를 듣고는 “배급을 국가에서 보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가 배급 식량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보고가 올라가면 “언제까지 국가가 인민을 먹여 살려야 하느냐”며 화를 내는 식이라는 것이다. 장성택과 같은 노회한 보호막이 사라진 뒤로 이런 모순적인 지시는 제대로 걸러지지 않고 하달되는 것 같다. 간부들도 무조건 알아서 하라고 한 뒤 한순간에 찍혀 처형당하는 현실에 절망하지만 지금과 같은 분위기 속에선 찍소리 못하고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다.

장담컨대 금주령은 과거 김정일 시대의 금연령과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목표다. 2000년대 초반 담배를 끊는 데 성공한 김정일은 “흡연가와 컴맹,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21세기의 3대 바보”라면서 강력한 금연 캠페인을 시작했다. ‘장군님처럼 담배 끊어 강성대국 만들자’는 구호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의 지시는 어떤 처벌에도 먹혀들지 않았다. 더구나 그렇게 떠들썩하게 금연령을 내린 몇 년 뒤 본인 스스로 다시 담배를 물고 TV에 나타났으니 금연령을 충실하게 따랐던 인민들은 진짜로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김정일은 스스로 담배를 끊고 인민들에게 금연령을 내리는 염치라도 있었다. 김정은 시대엔 이런 염치마저 사라진 것 같다. “아버지처럼 살지 마”라고 했다는 김여정의 말은 북한 주민들이 지금 제일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김정은#와인#금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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