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미경]북-일 합의를 지켜보며 떠오른 얼굴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중국이 탈북자들을 강제 송환시킬 때면 언제나 미국 워싱턴 주재 중국대사관 앞이 시끄러워진다. 북한인권 단체와 한인 사회가 ‘강제 북송 중단하라’고 쓴 피켓을 들고 행진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

그런데 이런 시위 현장에 일본인들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들은 일본인 납북 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현장에 나온다.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하지만 주변에서 일본 납북자 문제를 설명하는 팸플릿을 열심히 돌리며 미국인들에게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한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시마다 요이치(島田洋一) 후쿠이 현립대 교수에게 “왜 직접 관련도 없는 중국 탈북자 강제 송환 반대 시위대에 섞여 일본 납북자 시위를 벌이느냐”고 물었다. 그는 “인권 차원에서는 비슷한 문제다. 일본 납북자는 오래된 이슈라 관심을 끌기가 쉽지 않다. 중국 강제 송환 반대 시위대에 얹혀서라도 이슈로 만들어야 한다”고 답했다. 일본 납북자 문제에 관심이 있는 미 의회와 정부 관계자들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납북자구출연합 대표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서 건너왔다.

그 후 한 일본 신문 워싱턴 지사장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서재는 일본 납북자 문제 해결 팸플릿과 포스터로 가득했다. 그의 미국인 부인 수전 발소 씨는 워싱턴에서 일본 납북자 구출 단체를 조직하고 미국 정계를 상대로 로비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의 부인은 변호사가 본업이었지만 일본 납북자 문제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듯했다. 일본 납북자 역사를 장시간 설명하는 발소 변호사를 보며 미국에서 일본 납북자 문제가 주목받고 그 해결을 위한 청문회가 열리는 이유를 알아냈다. 다름 아닌 일본계 인사들의 끊임없는 활동 덕분이었다.

최근 일본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북한과 일본 간 합의를 지켜보며 이들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북-일 합의가 한미일 동맹에 균열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와 미국과 사전 협의 없이 너무 앞서 나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북-일 대화의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일본이 인권 차원에서 납북자 문제 해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점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아베 정권 훨씬 이전부터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일본 납북자 문제를 빠짐없이 거론하며 미국의 관심을 촉구해왔다. 시마다 교수나 발소 변호사 같은 민간단체들의 활동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은 최근 세계 분쟁, 재난 지역에 구조지원 활동을 강화하고 납북자 문제의 인도주의적 해결을 강조하면서 미국에서 지지 기반을 넓히고 있다.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일본 실장은 “미국은 애초부터 북핵과 인권 문제를 분리해서 봐왔다”며 “미국에는 일본의 행보에 불만도 있지만 국제사회 기여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 지역안정 차원에서 환영하는 목소리가 더 높다”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최상의 한미관계를 일본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그러나 더이상 이런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한국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확대, 납북자 문제 해결 등에서 미국의 시각이 우리와 미묘하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이상 ‘찰떡 공조’만을 외치며 미국을 믿고 있기에는 일본이라는 변수가 너무 크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어정쩡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고차원의 외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미경 워싱턴 특파원 mickey@donga.com
#탈북자#납북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