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연수]‘현금 only’로 탈세하는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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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수 논설위원
신연수 논설위원
은마상가는 서울 강남구의 명물로 불린다. 고층 빌딩이 즐비한 강남 한복판에 있는 이색적인 재래시장인 데다 종합 반찬가게부터 중고 명품가게까지 없는 게 없다. 해외 관광객들이 관광 명소의 하나로 꼽을 정도다. 그런데 이 상가에선 ‘현금 온리(only)’다. 신용카드를 내밀면 곧바로 “현금 주세요”라는 말이 돌아온다.

청담동과 압구정동에 즐비한 가게들도 마찬가지다. 강남역과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에선 드러내놓고 “현금 달라”고 한다. 적은 액수만 그런 게 아니다. 강남 미용실에선 퍼머넌트 한 번에 최소 20만 원 안팎인데 현금을 내면 10% 이상 싸게 해준다. 현금영수증도 안 끊어 준다.

처음엔 ‘영세 자영업자(?)인 데다 요즘 경기도 안 좋으니…, 오죽하면 그럴까’ 생각했다. 임차료에다 전기요금 수도요금 내기도 빠듯하다는 불경기 아닌가. 하지만 얼핏 봐도 내 연봉보다 훨씬 많이 벌 것 같은 강남의 가게들이 오히려 강북의 가게들보다 더 집요하게 현금을 요구하는 게 의아해서 세금 전문가 몇 명에게 물어봤다. 그들은 “서울 강남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해 순수입이 월급쟁이의 3배인 사람도 세금은 월급쟁이의 3분의 1도 안 낼 것”이라고 했다. 거친 계산법이지만 유리지갑을 가진 근로자들보다 자영업자들이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자영업자들이 카드 수수료 1∼2% 때문에 현금을 선호하는 게 아니다. 소비자들이 지불하는 상품 가격이나 서비스 요금에는 부가가치세 10%가 포함돼 있다. 가게 주인들은 매출을 속임으로써 소비자가 부담한 부가세 10%까지 나라에 내지 않고 자신들이 ‘꿀꺽’하는 것이다. 여기다가 소득을 줄여 소득세를 안 내고, 현금으로 자식에게 물려주면 증여세와 상속세도 안 내니 삼중 사중으로 탈세(脫稅)를 하는 셈이다. 가게 물건을 사올 때도 현금 거래를 하면 도매상까지 연쇄적인 탈세가 이뤄진다.

변호사 의사 같은 고소득 전문직들은 더하다. 전관예우 논란으로 국무총리 후보를 사퇴한 안대희 전 대법관의 집에 있던 현금 5억 원은 여러 가지 뒷말을 낳았다. 그는 “소송 착수금을 돌려주려고 수표로 찾아 놨다”고 말했지만 납득할 만한 설명은 아니다. 그 많은 돈을 계좌이체 안 하고 현금으로 갖고 있었으니 변호사 업계의 현금거래 관행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강남 성형외과에서 현금으로 수술비를 내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국세청이 2005∼2009년 10차례 기획 세무조사를 통해 밝혀 낸 고소득 전문직의 소득 탈루 규모는 약 3조6000억 원. 실제 소득 대비 탈루율은 48%였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 직후 ‘지하경제 양성화’를 추진했지만 경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흐지부지돼 버렸다. 과세 기반을 넓히는 것은 정권이나 경기에 관계없이 추진할 일이다.

일부 소비자들은 자동차 수리를 하거나 전자제품을 살 때 “현금 내면 얼마나 싸게 해줄 거냐”고 먼저 흥정을 붙이는 경우도 많다.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탈세를 부추기는 일이다. 탈세 이전에 현금을 우대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여신전문금융업법 19조에는 ‘신용카드 회원을 불리하게 대우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국세청이나 여신금융협회에 신고하면 가맹점은 최대 1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소비자들이 앞장서 이중(二重) 가격을 감시해야 한다.

복지 확대로 나라 재정에 비상이 걸렸다. 부자와 대기업이 더 많은 기여를 해야겠지만 중간 계층이 능력만큼 내는 것은 필수다. 세월호 참사로 공무원들의 무능과 부패가 질타를 받고 있다. 공무원에게 “똑바로 하라”고 주장하려면 국민으로서 마땅히 내야 할 세금도 제대로 내야 한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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