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상훈]금융의 의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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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경제부 기자
이상훈 경제부 기자
첫 월급을 받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생 티를 채 못 벗은 병아리 수습기자 시절, 통장에 들어온 첫 월급에 감개무량했다.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사고 친구들에게 한턱냈는데도 수십만 원이 남았다. 신문 경제면을 펴니 마침 필요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제목은 ‘새내기 직장인의 재테크 10계명’.

제1원칙은 주거래은행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밥 한 끼를 먹어도 단골식당에 가야 밑반찬을 넉넉히 주는 게 세상의 이치. 은행이야 다 거기서 거기니,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한 곳을 주거래은행으로 삼으라는 내용이었다. 읽고 보니 그럴듯했다. 급여통장을 개설한 A은행을 내 마음속의 주거래은행으로 찍었다.

돌이켜보면 의리도 이런 의리가 없었다. 연말정산을 하는 12월엔 “세제혜택 상품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권유를 받고 장기주택마련저축 통장을 개설했다. 노후 준비가 필요하다는 조언에 연금저축 계좌도 만들었다. ‘이왕이면 주거래은행’이라는 생각에 주식형펀드, 생명보험도 A은행 창구에서 가입했다. 해외출장을 떠날 때면 어김없이 A은행에서 환전을 했다. 신용카드도 당연히 A은행에서 만들었다. 예금이자를 더 주겠다는 다른 은행의 광고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거래은행과의 의리를 지키면 언젠가는 크게 한 번 혜택을 볼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믿음은 몇 년 뒤 흔들리기 시작했다. 열심히 거래해도 고객등급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은행 측은 매월 수백만 원의 거래로는 등급을 올려주기 어렵다고 했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으면서 변변한 추가 금리할인도 받지 못했다. 신규고객은 통장만 만들면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이용수수료를 감면해 주면서도 정작 장기고객은 먼저 요구하기 전까지 꼬박꼬박 수수료를 떼 갔다.

개인고객이야 조금 치사해도 그러려니 생각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사정이 다르다. 아무리 평소에 신용이 좋아도 1년에 두세 번 원리금 상환을 연체하면 대출금리가 곧바로 갑절 이상으로 뛴다. 연체금을 모두 갚아도, 담보가 충분해도 은행은 ‘신용등급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좀처럼 대출금리를 낮춰주지 않는다. 어떤 근거로 대출금리를 산정했는지 알려주는 은행은 찾기 어렵다. 은행으로서는 위험이 큰 채무자에게 까다롭게 구는 게 당연하다고 항변하겠지만 돈을 쓰는 쪽에서는 ‘비 오는 날 우산 뺏기’식 행태에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식이라면 은행에 대한 의리는 과감히 접어둘 필요가 있다. 이동통신사가 번호이동 신규고객에게 수십만 원의 보조금을 쓰는 것처럼 은행도 급여통장을 새로 개설하고 신규대출을 받는 고객에게 가장 공들이는 게 현실이다. 어떤 은행이 수수료 100원 덜 받고 대출금리 연 0.1%포인트 더 깎아 주는지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내 돈에 대한 의리가 먼저다.

이상훈 경제부 기자 january@donga.com
#주거래은행#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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