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좋다고 신고햐…” 할머니는 오늘도 빈집서 마음 졸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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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노인 대상 성폭력, 정부 대책은 전무

성폭행당한 노인의 상처는 컸다. 지난해 40대 남성에게서 두 차례 성폭행당한 충남 신모 할머니(80)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있다. 할머니는 가해자와 덩치가 비슷한 남자만 보면 놀라 달아나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성폭행당한 노인의 상처는 컸다. 지난해 40대 남성에게서 두 차례 성폭행당한 충남 신모 할머니(80)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있다. 할머니는 가해자와 덩치가 비슷한 남자만 보면 놀라 달아나는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백발의 파마머리를 한 그녀는 키가 150cm쯤 돼 보였다. 80년을 버틴 얼굴 피부는 고목 껍질처럼 억셌다. ‘○○노인복지센터’라고 쓰인 형광색 조끼에 검은색 털신. 배꼽까지 올려 입은 바지의 고무줄이 볼록 나온 배를 이등분했다. 시골 ‘우리 할머니’ 모습 그대로였다.

신모 할머니(80)는 ‘그놈’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빛이 변했다. 5일 충남의 한 읍내에서 만난 그녀는 “나한테 그놈을 데려와. 칼로 콱 찔러 죽일 겨”라며 격분했다. 신 할머니는 지난해 여성 노인 상습 성폭행범인 양모 씨(49)에게 자신의 집에서 두 차례 성폭행당한 피해자였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할머니들도 성범죄에 노출돼 있다. 성범죄자들이 젊고 매력적인 여성만 노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약한 상대를 선호한다. 여성 노인은 제압이 쉽고 특히 신고를 꺼려 성범죄자에게 손쉬운 공격 대상이다.

2008년 ‘나영이 사건’을 계기로 아동 성폭력 피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회적 보호망이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약자인 여성 노인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있다. 12일 경찰청에 따르면 아동(만 13세 미만) 대상 성범죄는 2009년 1017건에서 지난해 1123건, 올해 1039건(11월 현재)으로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노인(만 60세 이상) 대상 성범죄는 2009년 244건, 지난해 320건, 올해 370건(11월 말 기준)으로 늘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수사 당국의 관심이 아동, 장애인에게 집중되면서 남은 약자인 노인 성범죄가 늘어나는 일종의 ‘풍선효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 신고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경기도의 A요양원에서 지내는 김모 할머니(63)는 요양원 총무 김모 씨(48)에게서 지난해 11월부터 9개월간 70여 차례나 성폭행당했다. 하지만 신고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가족 없이 기초생활수급비 45만 원을 받아 생활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A요양원은 월 15만 원에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할머니는 “신고하면 원장님이 날 쫓아낼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범행은 할머니의 하소연을 전해 들은 요양원 여직원이 수사기관에 제보하고 나서야 끝났다. 지난달 구속 기소된 김 씨는 검찰에서 “할머니가 신고도 안 하고 저항도 안 했다”며 “할머니도 좋아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할머니는 4년 전 뇌출혈로 뇌수술을 받은 이후 몸 오른쪽이 마비돼 있었다. 김 할머니의 법률 조력인을 맡은 류승언 변호사는 “노인 상당수는 피해 사실을 신고해 소문이 나면 현재 거주지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성범죄 신고율이 10%가량으로 추정되는데 노인의 신고율은 5%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노인은 성폭력은 여자가 잘못해 발생한다는 식의 교육을 받은 세대여서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을 더 수치스러워한다는 것. 이 때문에 노인 대상 성폭력은 실제론 연간 수천 건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지숙 평택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노인은 강간을 당하고도 당할 뻔했다거나 도둑이 들었다고 축소 신고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놈이 밤에 얼굴에 뭘 뒤집어쓰고 눈만 내놓고 왔는데 생각하면 시방꺼정 무서워.”

지난달 충북의 한 시골 마을에서 만난 박모 할머니(82)는 기자가 ‘그날’ 일에 대해 묻자 “부끄럽다”며 말을 아꼈다. 마을 어귀 외딴집에 혼자 사는 박 할머니는 지난해 5월 초 오전 2시 양 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양 씨는 토시로 복면을 한 채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할머니는 호통을 쳤다.

“다 늙은 사람에게 뭐하는 짓이여.”

양 씨가 맞받아쳤다.

“늙으면 여자 아니여?”

할머니는 신고하지 않았다. “뭐 좋은 일이라고 신고를 햐. 아들한테도 ‘도둑이 들었는데 훔쳐간 건 없다’고만 혔어. 아들도 ‘크게 다친 데 없으면 그냥 넘어가자 혀.”

피해 사실을 묻어두려는 노인의 특성을 성범죄자는 교묘히 파고든다. 가해자들은 ‘노인은 신고당할 걱정 없이 성폭행해도 되는 대상’이라는 그릇된 확신을 갖는다. 박 할머니의 망설임은 4건의 노인 연쇄 성폭행이 일어나는 단초가 됐다.

한 달 뒤인 지난해 6월 17일 오전 2시 양 씨는 다시 할머니를 찾았다. 한층 과감해진 양 씨는 방 창호지 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섰다. 복면을 한 그가 박 할머니의 두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신고 안 했지?”

할머니는 대꾸를 못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네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또 왔어.”

“왜, 두 번 오면 안 돼?”

연이어 성폭행에 성공한 양 씨는 활동 무대를 넓혔다. 양 씨는 인근 충남의 한 외딴집에 혼자 살던 신 할머니를 지난해 7월과 9월 두 차례 성폭행한 뒤에야 경찰에 붙잡혔다.

폐지를 모아 팔며 혼자 살던 84세의 김모 할머니는 부산 서부경찰서 형사들 사이에서 ‘민원왕’으로 불렸다. 폐지가 조금 없어지기만 해도 바로 경찰서에 달려와 “빨리 범인을 잡아 달라”고 소리쳤다. 이런 할머니가 3개월 넘게 침묵을 지킨 일이 있었다. 무료 급식소에서 만난 오모 씨(49)에게 폐지 수거를 도와달라고 한 것이 비극의 발단이었다. 할머니가 내어준 옆집에서 지내던 오 씨는 ‘야수’로 돌변했다. 그는 4월∼6월 말 4차례에 걸쳐 할머니 방에 침입해 성폭행을 시도했지만 할머니가 완강히 저항해 미수에 그쳤다. 할머니는 오 씨가 잡혀 들어가면 폐지를 모을 때 도움을 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다 7월 11일에야 경찰에 신고했다.

“이 나이에 젊은 놈한테 그런 일을 당했다 카면 아무도 안 믿을 거 같고…. 그놈을 빨리 쫓아내주소.”

본보가 2004년부터 올해 11월 말까지 발생한 노인 대상 성폭력 사건 2000여 건 중 당사자 인적 사항과 사건 개요가 확인된 85건을 분석한 결과 가해자 평균 나이는 44.9세, 피해자는 74.6세였다.

이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성폭행이라도 상대가 젊은 남자면 ‘늙은 여자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라는 식의 어이없는 편견이 뿌리 깊다”며 “이런 상황에서 피해 사실을 밝힐 수 있는 노인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늘어나는 노인 대상 성폭력, 정부 대책은 전무
○ 죽음보다 더한 상처

충북의 박 할머니와 충남의 신 할머니를 연쇄 성폭행한 양 씨에 대한 1심 재판이 2월 대전지법에서 열렸다. 당시 변호인은 “이 사건 피해자들의 경우 통상적인 피해자보다 정신적인 피해가 적다는 점을 감안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본보 취재 결과 노인의 상처는 심각했다.

노인은 피해 이후 4가지 감정에 시달린다. 자신이 가장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안 뒤 느끼는 무력감, 자식 나이의 남자에게 당한 수치심, 편견에 시달려야 하는 모욕감, 신고한 다음엔 ‘젊은 남자의 인생을 망쳤다’라고 생각하는 죄책감이 뒤섞인다.

각계의 후속 조치가 이어지는 아동·장애인과 달리 노인은 소외돼 있다 벼랑 끝에 내몰린다. 지난해 8월 경기 평택시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남성 간호조무사(33)에게 성폭행당했다고 신고한 서모 씨(62)는 같은 해 10월 투신자살했다.

‘민원왕’이었던 부산 김 할머니의 아들(54)은 올해 9월 7일 어머니 집을 찾았다가 주저앉았다. 할머니는 대문 철침에 묶은 끈에 목을 매 숨져 있었다.

할머니는 자살 직전 10여 일을 악몽의 현장인 자신의 집에 혼자 방치돼 있었다.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양형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할머니는 밥을 거의 먹지 못해 아사(餓死) 직전까지 갔다. 처지를 비관해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행인이 발견해 신고하기도 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3주간 입원할 때는 “내가 몇 달 동안 그놈한테 시달림을 받았다”란 말을 반복하며 덜덜 떨었다.

본보가 최근 발생한 노인 성폭력 사건 10건(피해자 15명)을 심층 취재한 결과 피해자 중 2명은 자살했다. 7월 폐지를 모으던 중 이모 씨(35)에게 성폭행당한 A 할머니(69)는 사건 발생 7일 만에 숨졌다. 흉부 및 두안면부 다발성 손상이 원인이었다. 지난해 8월 자신이 혼자 살던 집에서 이웃(40)에게 성폭행당한 소모 할머니(77)는 성폭행당한 뒤 살해됐다.

충남의 신 할머니는 최근 경로당으로 속옷을 팔러 온 남자를 보고 놀라 도망쳤다. 체격과 생김새가 가해자와 비슷했던 것. 할머니는 “가해자가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다”란 기자의 설명에도 “그놈이 틀림없다. 날 해코지하러 온 것”이라며 불안해했다.

신 할머니는 기자가 찾아간 5일, 집에 숨은 ‘나쁜 놈’을 찾는다며 장롱을 다 헤집어 놓았다.

“집에 그놈이 숨어 있나봐. 내가 오줌 눌 동안 숨었을까봐 무서워. 그놈이 또 올까봐 무서워.”

○ 문 열린 곳에서 아직도 혼자 산다

최근 충북의 박 할머니 집을 찾아 문을 두들겼다. 집은 대문이 따로 없었다. 도로를 향해 난 미닫이문을 열면 바로 거실로 쓰이는 6.6m²(약 2평) 남짓한 공간이 나오는 구조로 범죄에 취약했다. 문은 사건 당일처럼 잠기지 않았다. 기자는 “왜 문을 고치지 않느냐”고 물었다. “두 번이나 나쁜 짓을 당했는데 또 당하겄어.”

경남의 한 읍내에 혼자 사는 노모 할머니(82) 집 현관문은 아귀가 맞지 않아 닫히지 않았다. 노 할머니는 10월 15일 옆집 세입자 윤모 씨(49)에게 성폭행당할 뻔했다. 사건 당일 오후 2시 윤 씨는 열린 문으로 들어선 후 공격했다. 노 할머니는 “문을 고치려면 100만 원 넘게 든다고 해서 자식들한테 미안하다”라고 했다.

취재 결과 피해자 15명 중 사망한 4명을 제외한 11명 중 10명은 사건 발생 현장인 집이나 요양원에 혼자 방치돼 있었다. 노인 성폭력 사건 중 67.8%가 피해자 집에서 발생하는 등 혼자 사는 노인은 성폭력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지만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에도 이렇다 할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노 할머니는 “사건 당일 밤 딸에게 자고 가라고 했지만 바쁘다며 가버렸다”고 했다.

사건 현장을 떠난 노인은 충남의 신 할머니뿐이었다. 그 역시 차로 10여 분 거리인 다른 빈집으로 이사했을 뿐 혼자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사건 이후 마련한 방범 대책은 장에서 사온 생후 6개월 된 강아지 ‘복실이’ 한 마리였다.

손효주 hjson@donga.com·신광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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