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낮 삼아 ‘사랑의 仁術’… 절망 속에 희망을 비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의협-본보 필리핀 보롱간 의료구호활동 현장

대한의사협회-동아일보 1차 의료지원단은 11월 29∼30일 이틀간 필리핀 동사마르 주 보롱간 시에서 구호활동을 펼쳤다. 야간에도 구호캠프를 가득 메운 환자들에게 의료진이 약품을 제공하고 있다. 보롱간=김재명 기자base@donga.com
대한의사협회-동아일보 1차 의료지원단은 11월 29∼30일 이틀간 필리핀 동사마르 주 보롱간 시에서 구호활동을 펼쳤다. 야간에도 구호캠프를 가득 메운 환자들에게 의료진이 약품을 제공하고 있다. 보롱간=김재명 기자base@donga.com
대한의사협회와 동아일보의 1차 의료지원단이 찾은 필리핀 동사마르 주의 보롱간은 도시 기반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초대형 태풍 ‘하이옌’이 지나가면서 전기 수도 통신이 모두 끊겼다. 강풍으로 인한 피해가 특히 심했다. 야자수로 만든 집이 모조리 무너져 많은 주민이 거리에 나앉았다.

현지 보육원 ‘가족의 집’ 원장인 그레이스 수녀(53)는 “태풍이 모든 걸 망가뜨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살려 달라는 기도뿐”이라고 말했다. 외부의 구호품과 의료지원 역시 원활하지 않아 주민들은 하루하루를 지내기조차 버거워했다.

의료지원단은 구호 활동을 펼치지 못하고 귀국할 뻔했다. 30여 종(3t 분량)에 이르는 의약품 수송이 힘들어서다. 세부에 도착한 한국 공군의 C-130 수송기를 이용해 보롱간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타클로반까지 옮기는 데는 성공. 차량으로 6시간 넘게 걸리는 육로 수송이 문제였다. 당초 계획과 달리 필리핀군의 트럭을 이용하지 못해 지원단이 직접 민간 트럭을 구해 예정보다 하루 늦은 지난달 29일 오후부터 ‘가족의 집’ 보육원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한국 의료진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주민이 몰렸다. 이틀 만에 400여 명의 환자가 치료를 받았다. 대부분 천식과 호흡곤란 증세를 호소했다. 방상혁 단장(47·가정의학과)은 “최고 풍속 초속 105m에 이르는 강한 바람으로 도시 전체가 먼지로 뒤덮였다. 심폐기능이 연약한 어린이 대부분이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수도와 전기가 끊기자 피부병 환자 역시 크게 늘었다. 한 살배기 맬빈의 몸에서 누런 고름이 계속 나왔다. 황색 포도상구균이 옮기는 ‘세균성 농가진’. 한 달 넘게 깨끗한 물로 목욕을 못한 게 직접적인 원인이다.

20년간 재난지역 의료봉사에 나선 김의동 씨(64·외과)는 “농가진 환자가 많은 건 이 지역의 위생상태가 극히 나쁘다는 걸 의미한다. 수도시설 정비가 늦어지고 약품이 제때 공급되지 않으면 피부병이 창궐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진단했다.

주민 마리에타 씨(51·여)는 지난달 10일 잠을 자다가 집이 무너지는 변을 당했다. 이후 매일 악몽에 시달린다. 소변조차 시원하게 보지 못할 정도. 이 환자를 진료한 박수현 씨(30·여)는 “전형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로 보인다”고 말했다.

보롱간은 필리핀에서도 소득수준이 아주 낮은 곳이다. 평소에도 돈이 없어서 병을 방치하는 주민이 상당수다. 여덟 살인 바네사 양은 앞니가 모두 썩은 채로 엄마 손을 잡고 진료소를 찾았다. 치과의사가 없고 장비가 부족해서 의료진은 소량의 진통제만 건넸다. 이를 지켜보던 현지 수도사 조지프 씨(30)는 “가장 기본적인 예방접종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게 필리핀 서민의 운명이자 현실이다”라고 탄식했다.

의료지원단은 이곳에서 이틀간 머물렀다. 주민들은 산산조각 나버린 도로를 걸어 진료소를 찾았다가 감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레이스 수녀는 “당신들이야말로 절망에 빠진 보롱간에 보낸 하느님의 기적이다”고 말했다.

보롱간=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