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영]나라 밖에도 기적의 도서관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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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문화부 차장
이진영 문화부 차장
건축가 정기용은 ‘기적의 도서관’으로 기억된다. 문화적인 소외 지역에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 방송사가 협업해 도서관을 지어주는 프로젝트다. 현란한 외양으로 으스대지 않으면서도 구석구석 전문가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지는 도서관, 그 속에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감동적인 건축 이벤트였다.

요즘은 나라 밖에서도 ‘돕는 건축’이 이뤄지고 있다. 전후 선진국들이 한국에 국립의료원(1958년) 같은 건물을 세워 도왔듯 이제는 우리가 세계 곳곳에 병원과 교육시설을 지어주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공적개발원조 건축 프로젝트만 해도 놀랄 만한 숫자다. 최근 10년간 완공된 건물 중 총사업비 200만 달러(약 21억 원)가 넘는 것만 81개다. 베트남엔 5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을, 아프가니스탄 카불공대엔 정보기술(IT)센터를, 팔레스타인엔 행정수반 청사를 건립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100개가 넘는 건물을 짓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이 프로젝트에 건축가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문화는 빠진 채 건물만 원조하는 셈이다. 그래서 때로는 생색나기는커녕 욕을 먹는 경우도 있다. 중동 지역에 학교를 지으면서 생뚱맞게 조선시대 정자를 세워놓거나, 동남아시아 국가에 대형 병원을 지은 뒤 내부 벽에 타일로 대형 태극기를 그려 넣는 식이다.

이는 디자인 역량을 따지지 않는 설계자 선정 제도 탓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래서 KOICA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은 설계 공모를 거치기로 하고 그 첫 사례로 최근 우즈베키스탄 직업훈련센터 건축설계 공모를 했다. 하지만 참여한 건축가는 많지 않았다. 큰돈도, 버젓한 작품도 남기기 어려운 예측불허의 건축 환경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한 것일까.

원로 건축가 김인철 아르키움 대표(66)는 최근 네팔의 작은 마을에 FM라디오방송국을 지었다. 그는 재능기부를 해달라는 KOICA와 MBC의 요청을 받고 해발 2700m 히말라야 산자락에 수천 년간 축적돼온 현지의 건축 문화를 자신의 언어로 재해석한 방송국 ‘바람 품은 돌집’을 지어냈다. 1년간 크고 작은 비행기를 수차례 갈아타는 험한 여정을 6회 반복한 끝에 맺은 결실이다. 다음 달 4일엔 현지 주민들과 축제 같은 개국식을 갖는다. 그는 “병원이나 학교를 세우는 일에 건축 디자인을 보탠다면 한류는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 건축계는 어렵다. 직원 월급도 못 주는 스타 건축가가 많다.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어떨까.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는 1990년 버블 경제가 끝난 뒤 10년간의 불황기에 지방 곳곳을 돌며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건축 기반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종이 건축의 거장’ 반 시게루도 난민 수용소를 종이로 지으면서 스타덤에 오를 기회를 잡았다.

정기용은 생전 인터뷰에서 영국 디자이너 윌리엄 모리스의 자서전을 읽고 건축가가 되기로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모리스는 ‘충만감을 느낄 수 있는 노동을 할 것, 사회적 부의 분배를 도울 것, 환경의 질을 높이는 데 이바지할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건축을 통해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다면 근사한 삶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이 시야를 넓혀 세계의 그늘진 곳에서 돕는 건축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건 고단한 삶을 살아내는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어두운 불황의 터널 속에 갇힌 한국 건축계에도 기적의 빛을 선물해 줄 것이다.

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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