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자와 사랑에 빠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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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모든 사람의 동작이 일제히 멈췄다.

“이번에도 NG 없이 갑시다. 바로 테스트 실행하겠습니다.”

곧이어 자동차 정면에 놓인 3m 높이의 대형 기계가 ‘뚜∼ 뚜∼’ 하며 두 차례 경고음을 냈다. 그러고는 대형 기계에 매달린 둥그런 물체 하나가 시속 40km로 자동차 보닛 중앙부의 ‘X’자 표시를 강하게 때렸다. 보닛은 살짝 우그러졌을 뿐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튕겨나간 둥근 물체엔 상당한 충격이 가해진 듯했다.

찰나의 충돌 순간만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제야 바빠지기 시작했다. 한 직원이 컴퓨터 모니터로 실시간 전송된 충돌실험 데이터를 점검했다. 다른 직원들은 차량 보닛과 둥근 물체의 상태를 살핀 뒤 다음 실험 준비를 위해 보닛 교체작업에 들어갔다.

지난달 26일 인천 부평구 청천동 한국GM 안전기술연구소에서 벌어진 보행자 충격실험 현장이다. 둥근 물체는 더미(실물과 똑같이 만들어진 실험용 인형)의 머리 부분이다. 보통 차량과 정면으로 충돌한 보행자는 머리가 보닛에 부딪혀 큰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다. 이날 실험은 시속 40km의 속도로 달려온 차량이 건널목을 건너던 보행자를 치었을 때를 가정한 것이다.

실험을 지켜보던 임종현 한국GM 안전시험계획팀장(부장)은 “성공적인 실험을 위해선 3차원 측정기로 차량 위치와 더미의 충돌지점을 명확하게 잡아야 한다”며 “실험은 눈 깜빡할 새 끝나지만 이 순간을 위해 꼬박 이틀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 보행자 사망률 1위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10년 국내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5505명 중 보행자는 2082명(37.8%)이었다. 비율로 따지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2위는 일본(34.6%), 3위는 이스라엘(33.8%)이다. 영국과 미국은 각각 21.8%와 13.0%였다.

자동차를 개발할 때 ‘보행자 안전 기준’을 처음 적용한 곳은 유럽연합(EU)이었다. EU는 2004년부터 보행자 안전을 지키기 위한 자동차 안전시험평가 방법을 1단계로 도입했다. 올해 2월 강화된 2단계 규제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보행자 안전에 대한 기준이 강화된 ‘자동차 안전기준에 관한 규칙’이 올해 1월부터 승용차에 한해 적용되고 있다.

교통안전공단이 올해 7월 현대자동차 아반떼 쿠페와 쏘나타 하이브리드, 기아자동차 K3, 닛산 큐브, 한국GM 트랙스를 대상으로 ‘2013년 신차 안전도 평가(KNCAP)’를 실시한 결과 트랙스가 ‘보행자 안전’ 부문에서 역대 최고인 23점(30점 만점)을 받았다. 나머지 4개 차량의 점수는 12∼19점이었다.

○ 안전을 위해 차체 설계 바꿔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트랙스는 보행자 사고를 대비해 차체 설계 및 디자인까지 완전히 바꿨다. 김동석 한국GM 기술연구소 전무는 “차체가 높고 오프로드 주행을 위해 설계된 SUV는 보행자 안전 부문에서 가장 취약했던 차종”이라며 “트랙스는 개발 단계에서부터 보행자 충돌 시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교통사고를 당한 성인 보행자의 다리가 가장 먼저 닿는 부분은 차량의 범퍼다. 범퍼는 차량에 가해지는 충격을 줄여주는 역할 외에도 사람의 다리에 가해질 충격도 상당 부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트랙스에는 범퍼 안쪽의 ‘범퍼 폼’(발포 폴리프로필렌 재질의 충격흡수용 구조물)에 폴리프로필렌(PP) 소재로 만든 내부 지지대가 설치돼 있다.

보닛과 엔진 등 각종 부품 사이에 공간이 확보된 것도 특징이다. 보행자의 머리가 부딪혔을 때 보닛이 어느 정도는 안으로 찌그러져야 충격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권남석 한국GM 기술연구소 소형차안전성능개발팀장(부장)은 “트랙스는 차체 설계를 완전히 새롭게 바꿔 엔진과 배터리 등 각종 부품의 위치를 최대한 아래쪽으로 배열했다”고 설명했다.

보닛과 앞 창문이 만나는 ‘윈드실드’에도 보행자 안전을 위한 ‘히든카드’가 숨어 있다. 성인 남성이 교통사고를 당할 때 차에 부딪친 뒤 몸이 뜨면서 딱딱한 와이퍼 지지대에 머리를 부딪쳐 큰 부상을 입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대비해 아예 와이퍼 지지대가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보닛 끝 쪽 아래로 살짝 숨겼다.

한국GM은 보행자 충격실험도 예전보다 훨씬 정교하게 실시하고 있다. 실험은 보행자의 신장(성인, 어린이), 보행자 충돌 부위(다리, 머리), 자동차 충돌 지점(범퍼, 보닛의 각 지점)에 따라 각각 수십 차례 진행된다. 신차를 개발할 때마다 총 300회에 가까운 충돌실험을 한다는 게 한국GM 측의 설명이다.

○ 영업과 디자인 부서의 논쟁

충격흡수용 구조물을 새로 넣고 내구성이 강하면서도 탄성이 있는 비싼 소재를 쓰다 보면 당연히 뒤따르는 것이 비용 증가다. 아무리 좋은 기술도 생산원가를 지나치게 높인다면 자동차회사가 쉽게 채택하기 힘들다.

트랙스 개발 과정에서도 이런 고민이 있었다. 특히 “보행자 안전기술을 대거 채용해야 한다”는 안전기술연구팀과 “차 값이 너무 비싸져 안 된다”는 영업 및 마케팅팀이 개발 초기 단계부터 사사건건 부닥쳤다.

디자인팀과의 갈등도 있었다. 보통 대형 차량에만 적용되던 하부 보강재(LBS)를 범퍼 안에 넣고, 보닛 안쪽 공간 확보를 위해 차체를 약간 높이다 보니 전면 디자인은 다소 투박해졌다.

김 전무는 “어떤 기술이든 회사 내부 고객(다른 부서)을 설득하는 게 가장 어렵다”며 “보행자 안전에 대해서는 경영적 판단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 회사가 기여해야 한다는 논리로 경영진을 설득했다”고 전했다.

연구팀은 현재 새로운 용접기술 등을 개발해 보행자 안전기술을 최대한 적용하면서도 원가를 낮출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김 전무는 “보행자 안전에 관한 기술이 발달할수록 새로운 제조법도 지속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며 “앞으로는 보행자의 위치를 실시간 감지해 자동차 스스로 제동능력을 갖는 기술도 상용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천=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보행자#교통안전#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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