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개성공단 북한 환자 8년간 돌본 ‘그린닥터스’ 정 근 이사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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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통일된 남북의 모습을 개성공단에서 보았다”

정근 이사장이 개성공단 내 진료소에서 북한 환자들을 돌보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개성공단 의료봉사활동을 바탕으로 황해도 해주에 ‘코리아 결핵병원’을 짓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부산=서영수 사진전문기자 kuki@donga.com
정근 이사장이 개성공단 내 진료소에서 북한 환자들을 돌보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개성공단 의료봉사활동을 바탕으로 황해도 해주에 ‘코리아 결핵병원’을 짓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부산=서영수 사진전문기자 kuki@donga.com
개성공단 파행 133일째였던 14일, “다시 공단이 문을 연다”는 소식에 유달리 감회가 새로운 사람이 있었다. 2005년 1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만 8년 동안 개성공단에서 남북한 근로자들에게 무료 진료 봉사를 했던 재단법인 ‘그린닥터스’ 정근 이사장(53)이었다.

그가 이끈 의료진은 개성에 들어가 하루 평균 200명에 달하는 북한 근로자들의 건강을 살폈다.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 5만 명 대다수가 최소 한 번 이상 그린닥터스가 운영하는 진료소를 들른 셈이다. 이들이 가족들을 위해 받아간 의약품까지 감안하면 개성 사람 20만 명의 건강을 돌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번을 정해 봉사를 떠난 남한 의사만 1300명이 넘는다.

○ 처음엔 남-북 진료소 따로따로

정 이사장도 한 달에 최소 세 번씩 개성공단 병원으로 올라갔다. KTX가 생기기 전에는 떠나기 전날 새벽에 서울역에 도착해 찜질방에서 쪽잠을 자고 떠났으나 KTX가 생기면서 떠나는 날 당일 새벽 서울에 도착해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앞에서 버스를 타고 개성에 들어가는 강행군을 했다.

기업인도, 정부 인사도 아닌 의료인 입장에서 그는 개성공단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16일 부산 서면에 있는 그의 병원에서 만난 정 이사장은 “통일한국의 미래는 북한에 있다. 따라서 개성공단이 다시 문을 여는 만큼 과거보다 더 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저소득층과 노인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시작한 이후 외국인 근로자 진료까지 활동의 폭을 넓혀온 그는 2004년 4월 개성공단이 가동되고 이듬해 2005년 1월부터 통일부의 허가를 받아 공단에서 진료소를 세우고 봉사활동을 했다. 그는 초창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처음에는 북한 근로자를 치료하는 진료소는 현대아산이 운영하고 남측 근로자를 치료하는 진료소는 우리가 운영하는 식으로 따로 돌아갔다. 각각 66m²(약 20평) 정도의 작은 규모였고 거리도 500m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간에 교류는 있을 수 없었다. 우리도 처음 진료를 시작했을 때 남측 진료소에서 남한 근로자들만 진료했다.”

―언제부터 북한 근로자까지 치료하게 된 건가.

“공단을 운영하면서 처음에는 북측 진료소에 필요한 각종 비용과 약품을 현대아산이 지원해줬는데 2006년 정몽헌 회장이 타계하면서 현대아산 쪽이 더 이상 지원해주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면서 북측 진료소가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 북측은 궁리 끝에 우리 쪽에 ‘북한 근로자까지 맡아줄 수 없겠느냐’며 도움을 청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단체 이름을 영어(그린닥터스)를 쓰는 ‘부르주아’ 의사들에, 자신들이 싫어하는 기독교 신자들까지 많다며 배척하던 그들이 태도가 바뀐 건 연탄가스중독 환자들 때문이었다. 북한은 연료 사정이 좋지 않아 겨울에 나무장작을 때는데 2000년대 중반 우리 정부가 연탄을 많이 보내줘 사정이 나아졌다. 문제는 집 안 문을 닫고 연탄을 피우다가 연탄가스중독 환자가 늘어난 것이었다. 어느 날 밤중에 병원 문을 누가 다급하게 두들겨 나가 보니 당(黨)의 높은 사람이었다. 인근에 유일하게 우리 병원에 고압 산소치료기가 있었다. 그 환자를 치료한 이후 어떻게 입소문이 났는지 우리를 대하는 북측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남북으로 갈라졌던 진료소는 마침내 2006년 12월 ‘개성종합병원’으로 합쳐지면서 430m²(약 130평) 규모의 새 건물도 세웠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치과, 한방진료까지 개설했으며 X선, 초음파, 수술실까지 마련했다.

○ 남북환자 접촉 차단 시도 무용지물

―건물을 함께 쓰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

“북측 간부들은 처음부터 주민들이 섞이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당 간부들은 ‘남한 환자와 북한 환자가 들어가는 입구를 다르게 만들라’ ‘건물 안에서 양쪽 사람들이 만나지 않도록 중간에 벽을 세우라’ 등 환자들이 섞이지 않게 하고, 의료진만 문을 잠깐씩 왕래하라고 했다. 이런 주문을 받아들여 건물을 만들다 보니 입구가 두 개인 기형적인 건물이 됐다. 왼쪽으로 북한 근로자들이 들어가고, 오른쪽으로 남한 근로자가 들어가는 식이었다. 한 건물에 내과도 2개, 외과도 2개… 그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분단의 장벽’은 쉽게 무너졌다.

“입구를 아무리 분리해도 결국 안에서 뒤섞였다. 환자들이 X선 찍고 주사실로 이동하다 보니 자연스레 섞일 수밖에 없었다. 공장 안에서는 서로 눈도 안 마주치던 남북한 사람들이 병원 안에서는 인사도 하고, 서로 이야기도 나누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복도 대기실에 환자들이 죽 앉아있는데 남한 사람인지 북한 사람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보다 못한 당 간부들이 ‘복도 중앙을 가로막고 문을 새로 만들어 잠가 놓으라’고 하더라. 처음 3개월 동안은 그대로 했다가 나중엔 ‘이래서는 환자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설득해 낮에만 문을 열어 놓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대화는 진료 과정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로 넘어갔다.

“처음에 나도 그랬지만 남한 의사들은 실제 만난 북한 환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군인이라고 하는데도 키가 우리나라 중학생 정도로 작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다. 공단 근로자들 중에는 유난히 결핵 환자가 많았다. 젊은 사람들만 특별히 뽑았다는데도 그랬다.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북한 측에 ‘공단 직원 전체를 대상으로 건강검진을 해 보면 안 되겠느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날까 ‘안 된다’면서 질겁하다 결국 수락하더라. 나중에는 우리가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약을 지속적으로 먹였다. 간염 접종도 시켰다.”

○ 부모님-자식 걱정까지 털어놔


―북한 의사들은 남한 의료진들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나.

“진료소가 합쳐진 직후인 2007년 1월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북한 의사와 간호사 23명이 싹 사라졌다. 일주일 만에 나타났는데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으니 ‘교육받고 왔다’고 했다. 병원이 합쳐진 갑작스러운 변화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위에서 지시를 내린 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갑던 마음들은 눈 녹듯 녹았다. 나중에는 북한 의사가 먼저 ‘약 좀 더 갖다 주세요’ ‘의사 가운, 간호사복 좀 갖다 주세요’라며 도움을 청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한 젊은 치과의사는 임플란트 기술을 배우고 싶다며 재료를 구해줄 수 있는지 상의하기도 했다.”

“개성공단이 남북관계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는가”라고 묻자 차분하던 그의 부산 말씨 톤이 올라갔다.

“처음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천양지차로 변했다. 우선 서로가 친숙해졌다. 공단 내 구내식당 TV에서 한국 방송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북한 사람들이 화면을 힐끔거리지도 않고 오로지 밥만 먹었다. 그중에는 화면을 곁눈질로 쳐다보다 자아비판까지 하러 다니느라 고초를 겪은 사람들도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어떠냐고? 서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에서부터 어느 배우를 좋아하는지까지 이야기한다.”

그는 “나는 통일된 남북의 모습을 개성공단에서 보았다”면서 “개성공단이야말로 통일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북한의 20, 30대 근로자들이 남한에 대한 적대감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바로 이것이야말로 통일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가족들에게 약이 가고, 남한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되면 마침내 통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처음에는 200명이 2000명에게, 마침내 2000만 명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개성공단이 생기면서 남북을 가르는 분단선이 공단 쪽 뒤까지 물러났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원치 않는 북한 주민, 통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북한 주민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이야말로 통일의 출발점이다. 지금 남한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최소 월 150만 원을 주면서 쓰고 있다. 기업들은 인건비가 비싸다며 외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중이다. 하지만 개성공단 인건비는 남한 내 10분의 1도 들지 않는다. 제품도 ‘메이드 인 코리아’이다. 북한의 생활수준(국내총생산·GDP)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통일비용을 줄일 수 있다. (주민들을) 말려 죽여 통일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 공단에서 만난 우리 누이들의 얼굴

정 이사장은 그동안 북한 근로자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면서 “1970년대 가발공장, 신발공장에서 동생과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던 여공 누이들을 떠올렸다”고도 한다.

“처음 북한 환자들은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나중에는 부모님 이야기, 자식 걱정까지 털어놓았다. 근로자들이 와서 ‘밤샘근무를 하거나 연장근무를 하게 됐다. 이번 달은 수당을 좀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30, 40년 전 우리 부모 세대, 누이 세대의 열정을 보는 듯했다.”

그린닥터스의 무료 진료는 남측 진료소를 유료 진료로 운영하겠다는 통일부 방침에 따라 2012년 12월 말 끝났다. 정 이사장은 “이번에 공단이 다시 문을 여는 만큼 무료 진료를 다시 시작했으면 한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에 인도적 지원은 아끼지 않겠다고 한 만큼 좋은 소식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무료 진료를 통해 통일 체험을 한 그의 꿈은 크다. 한국결핵협회, 캐나다의사회, 그린닥터스가 손을 잡고 황해도 해주에 결핵병원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해주는 1927년 캐나다 선교사들의 지원하에 한반도 최초로 결핵병원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그가 들려준 개성공단 이야기는 기자에게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세 시간 가까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멀리서 머릿속으로만 느껴지던 ‘통일’이나 ‘북한 사람들’이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졌다. 개성공단이 한반도의 미래와 평화를 향한 실핏줄이 되어 힘차게 박동하는 날이 오기를 그와 함께 빌어본다. -부산에서

:: 그린닥터스 ::

1997 년 ‘백양의료단’이 전신으로 2004년 국경, 지역, 인종을 초월한 의료봉사단체로 출범했다. 인도 필리핀 카자흐스탄 중국 등에 의료진을 파견해 10년간 3만 건 이상의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2005년 1월∼2012년 12월 개성공단 남북협력병원을 운영했다.

인터뷰=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이 기사는 동아일보 인턴기자 문성민 씨(고려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가 참여했습니다.
#개성공단#그린닥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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