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조선총독부 항복 조인식 인천서 열릴 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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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 항복문서 사본-초안, 전북 완주 책박물관이 공개

1945년 9월 9일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눈빛출판사 제공
1945년 9월 9일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눈빛출판사 제공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경 서울 조선총독부 중앙회의실.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은 미군 제24군단 존 하지 중장, 제7함대 T C 킨케이드 해군제독 등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곧 일본의 8·15 항복 이후에도 총독부 건물에 걸려 있던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걸렸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끝나고 미군정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날 항복문서 조인식 장소가 경성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인천에 정박해 있던 7함대 선상에서 열릴 예정이었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공개됐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항복문서 조인식에 앞서 작성된 항복문서 초안(왼쪽)과 영어판 항복문서 사본.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항복문서 조인식에 앞서 작성된 항복문서 초안(왼쪽)과 영어판 항복문서 사본.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3일 전북 완주군 완주 책박물관(관장 박대헌)은 1945년 9월 9일 작성된 영어판 항복문서 사본과 타자기로 타이핑한 것으로 보이는 항복문서 초안을 공개했다. 지금까지 항복문서는 일본어판의 존재만 알려져 있었다. 항복문서 초안은 첫 공개다.

영어판 항복문서에는 38도 이남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통치 권한을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이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인천 도착 전 함상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항복문서 초안은 일부 미세한 표현 차이가 있을 뿐 서명된 문서와 다를 바 없다. 다만 서명 장소가 ‘서울’이 아닌 ‘인천’으로 돼 있다.

이에 대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는 “미국이 7함대 군함 20여 척을 몰고 인천에 왔기 때문에 그 위세를 과시하려고 인천으로 부르려고 했을 것이다. 당시 인천에 있던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해방시킨다는 상징적 의미도 담았다. 짐작하건대 당시 건강이 나빠져 거동이 불편했던 아베가 인천까지 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이에 앞서 같은 달 2일 일본에서 이뤄진 항복 서명도 도쿄만 요코하마에 정박 중이던 미군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이뤄졌다.

다른 전문가는 “아마도 패전국인 일본이 먼저 미국에 예우를 다하려고 먼저 인천으로 가겠다고 청한 것 같다. 다만 미군이 어차피 서울로 들어가야 하니 편의상 그곳에서 하자고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조선총독부#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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