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염재호]한국의 쿠리치바를 꿈꾸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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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호 객원논설위원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염재호 객원논설위원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브라질의 쿠리치바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에코 시티로 명성이 자자하다. 타임지가 “지구에서 환경적으로 가장 올바르게 사는 도시”로 선정했고, 전 세계 매스컴이 ‘꿈의 도시’ ‘희망의 도시’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쿠리치바는 미래도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 방문하고 싶은 도시다. 이 때문인지 1965년 35만 명의 인구를 상정하고 만들었던 계획도시가 지금은 180만 명이 사는 대도시가 됐다.

오늘 우리가 쿠리치바를 꿈꾸는 것은 쿠리치바에 자가용이나 지하철 대신 간선급행버스(BRT)라는 획기적인 대중교통 시스템이 달리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성장률이 브라질 평균보다 45%나 높고, 24시간 보건소에 30여 개의 공공도서관, 5000∼8000권의 책과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지혜의 등대’ 50곳, 100여 개 가까운 박물관과 문화시설이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도시 공동체가 사회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함께 모아서 도시 진화를 이루어낸 현장이 바로 쿠리치바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고민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문제다. 1955년부터 1963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712만 명으로 인구의 15%나 된다. 최근 민간부문 평균퇴직 연령이 52.6세라는 통계에 따르면 상당수가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두고 있다. 고도성장기에 치열한 경쟁을 몸으로 겪으며 우리 경제를 세계 13위로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헌을 한 이들이 이제는 무대 뒤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인생이모작은 어떤가.

우리나라 전체 평균 고용률이 59.4%인 데 비해 베이비부머들의 고용률은 73.1%나 된다. 결코 좋아할 일이 아니다. 서유럽과 달리 사회안전망이 마련돼 있지 않아 퇴직 후 생계가 막막하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게다가 이들은 아버지세대와 달리 퇴직 후 삼사십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이들 중 연금생활이 가능한 비율은 20% 전반에 불과하다. 이들은 부모와 자식을 모두 부양한 마지막 세대이자 자신의 노후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첫 세대, 즉 슬픈 세대인 것이다.

그러니 안락해야 할 베이비부머들의 노년은 위기 그 자체다. 황혼이혼이 급증하고, 65세 이상 노인빈곤율은 76.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25.0%)의 세 배가 넘는다. 1990년 65세 노인자살률이 인구 10만 명당 14.3명이던 것이 2012년 79.7명으로 20여 년 만에 여섯 배 가까이로 늘었다. 일본의 17.9명, 미국의 14.2명에 비하면 네다섯 배 이상이나 된다.

국가가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생을 마칠 때까지 존엄을 유지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박근혜정부의 국정비전이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라고 하면 이에 걸맞은 희망을 줘야 한다. 쿠리치바의 모델을 원용하면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가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는 도시를 마련해 주는 것이 대안이다.

이제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인구 10만 명 정도의 에코 신도시들을 개발하자. 에코 신도시는 병원, 공원, 탁아소, 문화공간, 공공도서관과 북카페, 트램, 자전거와 보행자 전용도로, 24시간 거리, 생필품 직영소매점 등 다양한 사회 인프라를 갖춘 미래형 도시로 디자인해야 한다. 돈을 나눠주는 것보다 이런 도시를 만들어주면 부부가 100만 원 내외의 연금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하다.

베이비붐 세대의 평균 부동산 자산이 3억2000만 원이라는 통계가 있다. 최근 주목받는 땅콩집처럼 소규모 주택이나 아파트를 1억 원 정도에 제공하면 나머지는 노후자금으로 쓸 수 있다. 이 경우 ‘빌라 지 오피시우스’라는 쿠리치바의 주상복합형 건물이나 독일의 패시브 하우스처럼 최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개념의 주택이 모델이 될 수 있다. 태양광으로 전기를 생산해서 현재 사용하는 에너지의 10분의 1로도 냉난방이 가능한 주택이다. 대도시의 소비 거품을 제거하고 예술적 문화 인프라와 자연환경이 공존하는 슬로 시티, 공동텃밭을 가꾸고 영화나 예술공연도 감상할 수 있는 에코 도시도 결코 꿈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은퇴한 베이비부머들이 새로운 사회 서비스를 창출해내는 창조경제도 가능하다. 이런 신도시는 행정당국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쿠리치바와 같이 건축가, 행정가, 문화예술인들로부터 재능 기부를 받아 창조적으로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는 국토교통부가 아니라 보건복지부나 미래창조과학부, 문화체육관광부나 환경부의 프로젝트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도시가 전국 곳곳에 있다면 늙는 것이 그리 서럽지만은 않을 것이다. 또 누가 아나. 이 모델이 고령화사회로 고민하는 세계에 또 하나의 한류 바람을 일으키는 효자노릇을 할지.

염재호 객원논설위원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jhyeom@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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