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97>사랑 또는 두 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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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또는 두 발
―이원 (1968∼)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벼랑처럼 감추어져 있다
달처럼 감추어져 있다
울음처럼 감추어져 있다
어느 날 당신이 찾아왔다
열매 속에서였다
거울 속에서였다
날개를 말리는 나비 속에서였다
공기의 몸 속에서였다
돌멩이 속에서였다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당신의 발자국은 내 그림자 속에 찍히고 있다
당신의 두 발이 걸을 때면
어김없이 내가 반짝인다 출렁거린다
내 온몸이 쓰라리다

벼랑처럼 아찔하고 위태롭게, 달처럼 가깝고도 한없이 멀리, 내 발 속에 감추어져 있는 당신의 두 발. 북받치는 울음을 꿀꺽 삼킨 내 사랑. 사랑의 깊은 곳에 있는 공허함과 서정이 감각적으로 그려져, 독자 내면에 있는 사랑의 서사와 서정을 자극한다.

어느 날 사랑이 찾아와, 거울을 봐도 당신이 있고, 공기의 ‘몸’ 속에는 당신과 나의 숨이 섞여 있다. 열매처럼 향기롭고 옹골지고, 날개를 말리는 나비처럼 애틋하고 대견하고, 돌멩이처럼 단단한 이 사랑. 넓고도 깊은 당신과 나의 관계. 혼자 걸어도 당신과 함께 걷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게 나는 당신과 밀착돼 있다. 당신이 어디선가 걸을 때면 어김없이 나는 안다. 당신도 내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반짝이고 출렁거리고 온몸이 쓰라리다는 것을. 이토록 집중되고 온몸으로 감지하는 사랑! 이런 연애를 할 상대를 만난 화자는 행운아다. 그러나 달콤하게 들뜬 와중에도 왠지 마음 저 깊은 곳에 쌉쌀한 슬픔이 방울방울 작은 기포를 터뜨리는 사랑이여.

(참고, 혹은 김 빼기: 연애를 할 때 집착을 드러내는 건 대개 여자다.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고 하면 ‘아고, 발목 잡혔네!’ 할 남자도 있을 테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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