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첫 여성공채 20주년… 139명의 ‘나비효과’ 세상을 바꾸다

  • Array
  • 입력 2013년 4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 1993년 ‘삼성의 파격’ 이후

‘여성공채 바람’ 첫 걸음



여성공채 1기의 성공은 이후 삼성그룹이 본격적으로 여성 인력 확보에 나선 계기가 됐다. 1993년 8월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삼성그룹의 공채 광고(왼쪽)와 동아일보의 1992년 10월 9일자에 게재된 삼성그룹 여성공채 1기 관련 기사.

삼성그룹 제공·동아일보DB
‘여성공채 바람’ 첫 걸음 여성공채 1기의 성공은 이후 삼성그룹이 본격적으로 여성 인력 확보에 나선 계기가 됐다. 1993년 8월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삼성그룹의 공채 광고(왼쪽)와 동아일보의 1992년 10월 9일자에 게재된 삼성그룹 여성공채 1기 관련 기사. 삼성그룹 제공·동아일보DB
1992년 10월 10일 이화여대 교정이 들썩였다. 주요 일간지 1면에 삼성그룹의 ‘남녀사원 모집’ 광고가 큼지막하게 실린 날이다. ‘삼성은 여성 경영자 시대도 앞서 열어갑니다.’

이화여대 생물교육과 졸업반이었던 송명주 삼성전자 부장(43)은 20년 넘은 지금까지도 이 광고 문구를 외운다. 그만큼 여대생들은 남녀 차별 없는 공개채용을 애타게 기다렸다. 당시만 해도 여성들에게 대기업 입사는 꿈같은 일이었다. 대부분의 기업이 서류전형 단계에서부터 여성을 받지 않거나 모집 직종에서 남녀를 구분해 뽑았다. 여성은 디자인, 비서, 소프트웨어 분야 등에 국한됐다. 여대생들은 많은 경우 취업을 포기하고 결혼했다. 그나마 남녀 차별이 없던 언론사나 공무원 시험에 지원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시대에 남녀 차별 없는 공채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삼성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다. 당시 삼성전자 인사부장이었던 신원동 한국인재전략연구원 대표는 “사업부 임원들은 저마다 여성 공채 소식에 크게 반발했다. 이건희 회장이 세게 밀어붙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회상했다. 여대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체 지원자 1만1600명 중 13%인 1510명이 여성이었다. 남성들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139명은 1993년 3월 ‘여성 공채 1기’라는 이름표를 달고 입사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삼성그룹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103명이 퇴사하고 36명이 현직에 남아 있다. 약 26%가 살아남은 것이다. 국내 대기업 여성 직원의 평균 근속연수가 7.6년임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라는 평가다. 제일모직의 김정미 상무(43)가 2011년 처음 임원이 됐고 삼성전자, 삼성SDS, 삼성물산 등에 부장 20명, 차장이 15명 포진해 있다.

현재 삼성 직원의 29% 6만명이 여성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여성 인재 중용을 강조해 왔다. 사진은 2011년 7월 선진제품비교전시회에서 이 회장과 여직원들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 삼성그룹 제공
현재 삼성 직원의 29% 6만명이 여성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취임 직후부터 여성 인재 중용을 강조해 왔다. 사진은 2011년 7월 선진제품비교전시회에서 이 회장과 여직원들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 삼성그룹 제공
삼성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은 “여성 공채 1기 선발은 삼성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나비효과’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작은 변화가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첫 여성 공채 기수의 성공적인 안착에 자신감을 얻은 삼성그룹은 1년 뒤 규모를 크게 늘려 500명의 여성을 뽑았다. 남녀 차별 폐지는 현대, 대우 등 경쟁사로도 금세 확산됐다. 삼성그룹 대졸 신입사원 중 여성의 비중은 2009년 21%, 2010년 26%, 2011년 30%, 2012년 32%로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9일 만난 김 상무는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반 시절 입사원서를 내러갔더니 인사담당자가 ‘군대는 다녀왔느냐’며 비웃었다”며 “그렇게 폐쇄적이던 회사가 첫 여성 공채 이후 빠르게 바뀌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고 말했다.

제일모직(당시 삼성물산 의류사업 부문)은 금녀(禁女) 부서 중 하나이던 영업부서에 김 상무 등 여성 7명으로 ‘아마조네스’ 팀을 꾸렸다. 이 팀은 여성 특유의 친화력을 앞세워 영업소 판매기록을 연달아 갈아 치우며 기대에 부응했다. 1995년에는 김 상무를 여성 최초 ‘삼성 지역전문가’로 뽑아 미국 뉴욕으로 보내기도 했다.

2004년에는 첫 해외 여성 주재원도 탄생했다. 20여 년 전 채용 광고에 들떠 입사지원서를 냈던 송명주 부장 역시 현재 싱가포르에서 삼성전자의 동남아시아 가전판매 총괄을 맡고 있다. 현재 싱가포르에 나가 있는 삼성그룹 주재원 30명 중 5명이 여성이다. 송 부장은 국제통화에서 “입사했을 때만 해도 사업부마다 여자 화장실이 부족해 난리였는데 20년 만에 이렇게 바뀔 줄은 몰랐다”며 “여성 휴게소가 생겨 임신부들이 편히 쉴 수 있게 됐고, 사업장마다 훌륭한 어린이집이 들어서면서 육아 고민도 덜었다”고 말했다. 어린이집 확대는 이건희 회장이 2010년 직접 지시한 사항이다.

살아남은 여성 공채 1기들은 ‘내가 잘해야 2기, 3기가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냈기에 회사도 여성 인력에 대한 신뢰를 갖고 더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김 상무는 “입사 이후 못 버티고 3년이 안 돼 나간 동기들도 있지만 남은 이들은 ‘우리가 좋은 롤 모델이 돼야 된다’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일했다”고 돌이켰다.

여성 대졸 공채 2기 이광윤 삼성전자 부장은 “먼저 입사한 여자 선배들이 꿋꿋하게 버텨준 덕분에 많은 여성 후배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현재 삼성그룹의 국내외 임직원 21만 명 가운데 여성은 29%인 6만 명이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나비효과#여성공채#삼성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