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1등 콤플렉스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1536∼1584)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머니 신사임당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13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최근 출간된 ‘율곡 이이’ 평전에 따르면 그는 콤플렉스투성이의 문제아였다. 열여섯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그는 무단가출 후 1년간 승려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 책을 쓴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심리적 갈등을 겪은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방황과 고뇌를 슬기롭게 극복해 진정한 위인이 됐다”고 평가한다.

▷2006년 미국의 인기 리얼리티쇼 ‘서바이벌’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처음 우승한 권율 씨의 스펙과 경력은 눈이 부실 지경이다. 스탠퍼드대와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연방의원 입법보좌관, 판사시보를 지내고 매킨지와 구글에서 일했다. 그런 그가 인터뷰에서 “나는 루저(loser·패자)였다”며 “선생님을 실망시킬까 봐,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할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고 털어놓았다.

▷겉보기론 부럽게만 보이는 우등생의 내면에도 가족조차 모르는 콤플렉스와 상처가 많은가 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엄친아’로 불리는 모범생들이 자살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서울 대치동에서 고3 김모 군이 자살한 데 이어 지방 명문고에서 전교 1등을 하던 학생이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더이상 못 버티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자살 이유는 항상 최고의 자리를 지켜내야 한다는 ‘1등 콤플렉스’ 때문으로 추정된다.

▷집과 학교에서 칭찬받는 청소년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무얼까. 본보가 성적이 상위 10% 안에 드는 고교생 100명에게 물으니 ‘주변의 기대감’(41%)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한국의 청소년이 그만큼 일찍부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산다는 증거다. 성적이든 외모든 끝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거나 나의 가치를 타인에게 검증받으려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용기, 벼랑 끝에 서도 다시 시작하는 자기 갱신의 용기를 가지라고 말할 용기를 어른들이 가져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