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김화성]늙은 매화가 화르르 토해 낸 꽃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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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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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햐아, 드디어 화르르 꽃망울을 열었다. 아무래도 지난주 발걸음은 너무 성급했다. 그 놈의 ‘봄 입덧’ ‘봄 울렁증’ 탓이다. 몇 번이나 전화로 묻고 채근했는지 모른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옆 붉은 홍매. 너무 붉어 검은 빛마저 감도는 수백 년 늙은 ‘흑매(黑梅)’.

사진작가들이 그 ‘검은 빛’을 잡기 위해 저마다 헤덤빈다. 누구는 ‘흐린 날씨가 좋다’고 하고, 또 누구는 ‘해질녘 약간 비낀 빛에 찍어야 한다’며 망설망설한다.

재두루미가 발을 하나 들고 서 있는 듯한 단아한 나무 자태. 우산 모양의 가지런한 나뭇가지 머릿결. 입을 다소곳이 오므린 채, 발갛게 달아오른 꽃들이 숯불처럼 우꾼우꾼 이글거린다. 하나의 꽃마다 앙증맞고 깜찍한 다섯 장의 진홍 꽃잎. 뿌루퉁하게 입을 내민 모습이 영락없는 철부지 딸따니다.

‘봄의 신이 뭇 꽃을 물들일 때/맨 먼저 매화에게 옅은 화장을 시켰지/옥결 같은 뺨엔 옅은 봄을 머금고/흰 치마는 달빛에 서늘해라.’(고려시대 문인 진화·陳華)

매화는 역시 고묵은 토종 매화가 으뜸이다. 떼로 핀 매화는 ‘양계장 닭’ 같다. 섬진강변 농원 매화는 대부분 매실을 따기 위하여 ‘대량 양식’하는 일본 개량종이다. 꽃이 덕지덕지 붙는다. ‘매화’라기보다는 ‘매실나무’다. 고고한 맛이 덜하다. 향기도 위로 붕 뜨는 감이 있다. 후욱! 약간 지분 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우르르 피었다가, 우르르 진다. 벚꽃 닮았다.

조선 토종 매화는 꽃이 작지만 야무지다. 꽃이 띄엄띄엄 듬성드뭇하다. 어느 날 안간힘을 다해 화르르 토해 낸다. 매실은 그저 그렇다. 하지만 향이 은은하고 오래간다. 저녁밥 짓는 냄새처럼 가만바람에도 낮게 깔려 스며 든다. 알근한 암향(暗香)이다. 검버섯 마른 명태 같은 몸에서 어느 날 한 점, 두 점 꽃을 밀어 올린다.

장성 백양사 고불매(천연기념물 제486호)는 요즘 꽃망울이 성냥 알갱이만 하게 맺혔다. 중순쯤 돼야 연분홍 작은 꽃잎을 배시시 터뜨릴 것이다. 부얼부얼 털북숭이 다리에 사뿐히 내려앉은 연분홍 나비 모습이 아련하다. ‘칼 찬 선비’ 조식 선생(1501∼1572)의 남명매는 요즘 분홍빛 머금은 해뜩발긋한 꽃이 한창이다. 1561년 조식 선생이 산청 산천재 앞뜰에 손수 심은 것이다.

봄이 뻐근하다. 가슴이 빠개질 것 같다. ‘매화 향에 혈압이 오른다’(신석정 시인). 천지가 ‘텅 빈 충만’이다. 발효 폭발 직전이다. 퇴계 이황 선생(1501∼1570)은 왜 달밤에 매화꽃 언저리를 수도 없이 뱅뱅 돌았을까. 달빛과 매화 향기가 슴베든, 짧은 봄밤이 못내 아쉬워서 그랬을까. 이우는 달에 홀로 남은 매화가 안타까워서 그랬을까.

순천 선암사 늙은 매화들은 이제야 하나 둘 몸을 풀고 있다. 600여 살의 무우전 담장 가운데 홍매와 원통전 뒤편의 백매(이상 천연기념물 제488호)는 온 힘을 다해 꽃을 토해 내고 있다. 뒤틀린 가지에 부르트고 거무튀튀한 껍질. 거기에 나비처럼 매달린 분홍 홑꽃(홍매). 녹갈색 꽃받침에다 모시적삼 같은 하얀 꽃잎(백매). 다음 주쯤이면 벌들이 잉잉대며 코를 박을 것이다.

선암사 ‘뒤$(해우소)’은 늙은 매화에 둘러싸인 ‘고매 측간(古梅 厠間)이다. 홍매 두 그루와 백매 세 그루가 해우소 앞뒤로 가부좌를 틀고 있다. 조선 땅에서 제일 오래되고, 가장 멋들어진 뒷간. 누구든 들어서기만 하면 그깟 변비쯤이야 제풀에 스르르 괄약근 빗장을 풀어 버린다.

삐걱대는 대청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뒤를 본다. 번뇌와 망상을 훌훌 몸 밖으로 밀어 낸다. 바닥이 깊고 아득하다. 2층에서 일을 보면, 1층 밑바닥에 싸르락! 떨어진다. 편백나무 톱밥을 배설물 위에 층층이 깔아서, 묵직한 소시지변도 가볍게 내려앉는다.

칸막이와 벽은 나무 빗살로 가려졌다. 키가 낮아 옆 칸 사람과 ‘볼똥말똥’하다. 바람과 햇빛이 그 나무 틈새를 통해 무시로 들락거린다. 갓 피어나기 시작한 매화 향기가 따사로운 햇귀와 버무려져 향긋하다. 엉덩이가 고슬고슬 ‘매화 똥’이 화르르 벙근다. 벌거숭이 봄! 사각사각 봄날 가는 소리가 간지럽다. 문득 가르랑가르랑 늙은 매화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린다. 봄이 혼곤하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정호승의 ‘선암사’에서)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mars@donga.com
#매화#꽃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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