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최종섭]그날 이후 다시 찾은 연평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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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섭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최종섭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사건 직후 해병대의 대응이 늦었다고 질타를 해댈 때, 한미연합사 작전참모부장이었던 존 맥도널드 장군은 이런 말을 했다. “13분 후에 다시 와서 반격한다는 게 쉬울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포탄을 맞고 많은 사람이 다친 상황에서 수십 m를 전진해 반격한다는 건 용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제 전투를 수없이 경험했던 맥도널드 장군은 이미 성공한 작전으로 평가를 했었지만, 우리 정부는 지난달 이명박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하고서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승전’으로 규정지었다.

연평부대 전투 현장을 방문해 보니 포탄이 떨어진 자리엔 빨간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특히 불타는 철모를 쓰고도 응전했던 임준영 상병이 싸우던 K9 자주포 포상은 폭탄이 떨어져 움푹 파인 자리와 파편으로 무수한 홈이 파인 구조물이 당시의 처절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울창했던 소나무 숲은 포격으로 화재가 나서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으로 변했다. 벌써 2년이 흘렀지만 포격을 당했던 민가에는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짐작할 만하게 타 버린 가재도구, 깨진 찻잔, 찌그러진 세숫대야 등이 매캐한 탄 냄새와 함께 남아 있었다.

현장을 잘 보존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서정욱 하사와 문광욱 일병이 전사하고 민간인도 2명이나 사망한 끔찍한 현장을 보고도, 북한의 도발적 성향을 부정하고 무조건적인 화해협력을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국은 일본이 진주만 공격 때 침몰시킨 미 전함 애리조나호를 수장된 채로 둬 그때의 역사를 잊지 않고 있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름이 새어 나와 해변을 오염시키고 있어 배를 인양하자는 환경론자의 주장도 통하지 않는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자료를 모아둔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에는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벗어두었던 신발과 잘랐던 머리카락이 무더기로 쌓여 있어 관람객으로 하여금 당시의 참상을 떠올리게 한다. 현장은 말과 글이 표현하지 못하는 강한 힘이 있다.

아직도 적지 않은 국민이 천안함 사태가 북의 소행이라 믿지 않고 있다. 46명의 젊은이의 숭고한 생명이 희생된 사건을 남한의 정치적 불순한 의도는 아니냐고 의심하는 그들이 연평도 포격 도발 현장을 둘러보길 권하고, 특히 전쟁의 후유증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의 젊은 세대가 남북 분단의 냉정한 현실을 직접 보고 느끼면 좋겠다. 현장을 보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평화적인 남북의 공생 발전을 위한 협력도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현실 인식의 바탕 위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연평도는 불과 10여 km 앞에 북한 땅이 있는 전략 요충지이다. 제1, 제2 연평해전이 일어났던 것만 봐도 이 지역에 대한 남북 간의 긴장을 알 수 있다. 북한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황해도 해주항과 사곶 해군기지에서 잠수정과 공기부양정 등으로 공격해 온다면, 순식간에 수도권이 큰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코앞에서 그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는 연평도 해병부대는 우리에겐 더없이 든든한 방어막이다.

연평도는 여의도만 한 크기로 조기잡이로 유명했던 곳이고, 지금은 꽃게가 많이 잡히는 아름다운 섬이다. 어느 할머니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작은 섬에서 시집을 오셨으나 가보지 못한다고 했다. 언젠가 남북이 통일되고 나면, 분단 이전의 시절처럼 남북한 주민이 편안한 마음으로 놀러 갈 만한 장소이다. 연평도 포격 2주년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는 연평도에서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목숨 걸고 북방한계선(NLL)을 사수하고 있는 해병대 대원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최종섭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북한#연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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