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철 기자의 인물기행]조계종 종정 8년 만에 첫 인터뷰 법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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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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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없는가, 아무도 없는가… 어수선한 세상, 눈 밝은 사람들 많이 나와야”

《2010년 경인년(庚寅年) 백호(白虎)의 해가 밝았다. 60년 만에 한 번씩 온다는 희망의 해다. 호랑이 같은 기운과 백설 같은 순수함을 찾아 산문(山門)에 들었다. 법전 종정 스님(85)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말 제주에 폭설이 내렸을 때 숙소에서 사흘간 틀어박혀 최근 출간된 스님의 치열한 수행과 깨달음의 자서전 ‘누구 없는가’(김영사)를 읽고 큰 감동을 받은 터였다. 종정께서 가야산 추위를 피해 대구 한 사찰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입수해 곧장 대구로 달려 내려갔다.》

○ 종정의 새벽 108배 의미는
중생 제도 책임 다 못해… 그들이 편안히 살때까지 내가 더 많이 참회해야
○ 진정한 베풂이란
내가 가장 못난 것 먹을 때 함박꽃이 피어나고 좋은 것 먹으려할 때 다퉈
○ 새해 새 아침 덕담
나만 옳다는 생각 벗어야… 좀 힘들어도 인내하면 나도 세상도 두루 평안


한국불교의 대표 선승으로 오로지 수행으로 일관하며 일생을 하루처럼 살아 온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 치열한 구도 끝에 얻은 밝고
환한 얼굴이 마치 동자승 같다. 노장은 인터뷰와 자서전에서 우리 시대와 이 세상을 구원할 ‘누구 없는가. 아무도 없는가’를 묻고
있다. 대구=서영수 전문기자
한국불교의 대표 선승으로 오로지 수행으로 일관하며 일생을 하루처럼 살아 온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 치열한 구도 끝에 얻은 밝고 환한 얼굴이 마치 동자승 같다. 노장은 인터뷰와 자서전에서 우리 시대와 이 세상을 구원할 ‘누구 없는가. 아무도 없는가’를 묻고 있다. 대구=서영수 전문기자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북향 명당에 무심당(無心堂)이란 당호(堂號)가 붙어있었다. 무주심당(無住心堂)의 준말, 즉 ‘머무르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란 의미다. 절 앞으로 팔공산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작고 단단하기가 차돌멩이 같은 노장의 기상과 기백을 닮아 절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명(命)이 짧을 것 같다”는 주위의 말씀에 부모님이 열네 살에 절로 보낸 이후로 70년을 오직 화두에 매달린 대선사에게 법거량(法擧量)을 할 학식과 기백이 내게는 없다. 그랬다간 대번에 몽둥이찜질이 날아올 판이다. 그저 세속의 언어와 문자로 조심조심 안색을 살피며 질문을 드렸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동자승같이 천진무구한 미소로 맞아주시는 종정 스님의 너그러움에 ‘선처’를 고대할 뿐이었다. 노장은 예고 없이 찾아온 기자를 물리치지 않고 좌정하신 채 10년을 묵혔다는 머루주를 친히 잔에 따라 주신다. ‘도수’는 없고 ‘향기’만 그윽하니 곡차(穀茶)라 해야 할지 ‘음료’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위 분들이 “처사님이 공덕을 많이 쌓으신 것 같다”는 덕담을 해주신다. 기독교인인 ‘처사’는 몸 둘 바를 모를 뿐이다.

―선사는 불립문자(不立文字)입니다. 종정 스님의 평생 은사인 성철 스님께서도 수좌들에게 “책보다 화두(話頭)를 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본인 스스로 자서전을 펴내신 까닭은….

“나는 본디 법문도 안 하는 사람인데, 성철 노장님께서 연로하시자 해인사 일을 전부 나한테 맡겨 그때부터 일인 다역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방장이나 종정 같은 자리엔 도무지 뜻을 두어본 적이 없습니다. 항시 젊어서부터 초야에 묻혀 나무하고 농사지으면서 조용하게 살겠다고 생각해왔는데, 어쩌다보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주위에서 하도 권청(勸請)하기에 뒤에 오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입을 열긴 했는데, 지금도 ‘이게 과연 잘한 짓인가?’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 뿐입니다.”

―‘누구 없는가’란 자서전 제목을 스님께서 직접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치 우리 사회를 향한 화두이자 경책(警責) 같습니다. 왜 이런 제목을 주셨습니까.


“원래 그것은 옛 큰스님들의 흔한 법문입니다. 대중을 향해 어느 날 방장 스님이 거두절미하고 다짜고짜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었는데, 아무도 적절한 답을 못했어요. 만약 그 자리에 참으로 눈 밝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 물음에 즉각 답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노장님은 다시 ‘누구 없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역시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였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재가 나와야 합니다. 수행자라면 이 화두에 대해 제대로 답해야 하고, 또 사회 각 분야에서는 당면문제의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지혜 있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바람 때문에 이를 제목으로 주게 되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 벌써 10년이나 지났습니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해이기도 합니다. 2010년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해입니까.

“옛날엔 장작불에 무쇠솥을 얹고 쌀을 안쳐 밥을 해먹었고 오늘날엔 전기밥솥에 밥을 하지만 밥 먹고 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 않습니까? 백년, 천년이 되어도 사람들 마음 쓰고 사는 것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곧 내일입니다. 그래서 당나라 때 운문선사는 매일매일이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좋은 해(年年是好年)를 우리 모두가 만들어 나가야 하겠죠.”

노장께서는 태백산 깊은 산골짜기에서 10년 동안 두문불출했고, 대중 선방에서 정진할 때는 앉아있는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진 적이 없이 늘 꼿꼿했다. 그래서 별명이 ‘절구통 수좌’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나이가 80을 훨씬 넘겼는데 아직까지 남 신세 안 지고 내 손 내 발로 내 뒤치다꺼리 할 정도는 되니 이 정도면 건강한 것 아니겠습니까. 젊어서는 수행한다, 선원을 짓는다 해서 몸을 마구 부리다가 해인사 와서 조금씩 몸 관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날이 따뜻할 때 하루 2km 정도씩 걷고, 옛날부터 해오던 108배는 팔순이 넘은 지금도 매일 빼먹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또 소식(小食) 합니다.”

보통 108배는 참회의 의미가 있다고 들었기에, ‘종정인 스님께서 아직 참회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하고 파고들었다. 노장은 오전 2시에 일어나 108배 참회를 한다고 했다.

“참회는 종정인 내가 가장 많이 해야지요. 수행자는 부처님처럼 원만하게 수행해서 중생을 제도할 책임이 있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허물이 크죠. 일체 중생이 나보다 더 편안하게 살 때까지는 쉴 수 없는 거예요. 모든 중생이 조금도 고통이 없고, 영원한 안락을 누려야 내가 다리 뻗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유마경에서는 모든 중생이 아픈 까닭에 보살 역시 아프다고 했던 것입니다.”

―전생에 무슨 복을 그렇게 많이 지으셨기에 스님이 되시고, 종정의 자리에까지 오르셨습니까.

“복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가 많아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예부터 방장이나 조실에게 ‘그 갑옷을 언제 벗습니까?’ 하고 묻는 말이 있어요. 물론 화두죠. 높은 자리에 좋은 옷 입고 사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닌데 세상 사람들은 그걸 좋아합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대자(大字)로 누워 코를 드르렁거리면서 자는 것이 진짜 좋은 겁니다.”

―참선은 무엇이며 화두란 무엇입니까.

“예전에 비해 인류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해지고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더 빈곤해진 것 같고 개개인의 불만족은 더욱 늘었습니다. 인간 욕망의 확장이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욕심이 더 욕심을 부르는 거죠. 하지만 그 욕심이란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내 마음의 실체와 욕심의 주체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공부를 위한 방법론이 화두인 거죠. 화두를 통해서 나의 본래 욕심의 실체를 파악하고 때 묻지 않는 청정심을 계속 확인하면서 본래 마음으로 환원시키는 수행과정이 참선인 것입니다. 시간 나는 대로 화두를 들고 참선을 반복하면 자기의 마음씀씀이가 확 달라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단 10분씩이라도 규칙적으로 명상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평생 살아가는 데 큰 재산이 될 것입니다.”

이 지면을 빌려 고백하건대 2002년 스님이 조계종 종정에 취임하신 이래 친견(親見) 인터뷰를 생각해 보지 않은 적이 없다. 여러 경로를 통해 신청을 했지만 그때마다 퇴짜였다. 지난해에는 종단의 중진 스님 한 분을 모시고 해인사로 내려가 다짜고짜 종정 스님의 거처인 퇴설당 문을 두드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뜰 앞의 잣나무’는커녕 개미새끼 하나 보지 못했다. 언제 다시 뵈올지 모르는데 세상사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다.

―경제 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과 한국인은 과연 희망과 미래가 있는 나라이자 민족입니까.


“잘살아요. 지금도 잘사는 겁니다. 옛날 생각을 한번 해 보세요. 요즈음은 지나치게 잘사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될 때도 있어요. 우여곡절이 많을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자빠지지만 않으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옵니다. 태풍을 만났는데 울고불고 해서 되겠습니까? 덜 급해서 우는 겁니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복잡하더라도 자신을 돌아보며 정신을 잃지 않으면 길이 열리지 결코 막히지 않아요. 지금 우리 국민이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가를 망각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가면 그것을 인식하게 될 거예요.”

종정 스님 접견실에는 스님이 직접 그린 일원상(一圓相)이 걸려 있다. 이는 깨달음의 세계를 형상으로 가장 근접하게 나타낸 것. 맞은편에는 스님의 친필인 ‘청정무애(淸淨無碍)’가 있다. 대구=서영수 전문기자
종정 스님 접견실에는 스님이 직접 그린 일원상(一圓相)이 걸려 있다. 이는 깨달음의 세계를 형상으로 가장 근접하게 나타낸 것. 맞은편에는 스님의 친필인 ‘청정무애(淸淨無碍)’가 있다. 대구=서영수 전문기자
―나라와 민족의 격(格)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분에 맞게 살아야지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올바른 정신을 옆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큰 재산입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못한 나라를 배려하고 도와야지요. 내가 열일곱 살에 강원(講院)에서 공부할 때만 하더라도 먹을 것이 없어 밤을 줍고 콩 농사를 지어 양식으로 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잘삽니까? 이젠 잘살지 못하는 이웃을 도와줘야 해요. 내가 쓸 것 다 쓰고 남아서 도와주는 것은 진정으로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일곱만 쓰고 셋을 남에게 주는 것이 진정한 베풂이에요. 전쟁은 어디 먼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장 못난 것을 먹을 때 함박꽃이 피어나고, 내가 좋은 것을 먹으려 할 때 다투게 되는 겁니다.”

―금융위기와 기후변화 등 인간의 탐욕이 가져온 글로벌 위기가 점점 더 인류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어떤 해법을 갖고 있습니까.


“세상의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내 몸과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조그만 벌레 하나도 해롭게 하면 저만치 도망가 버리지 않습니까? 다른 생명과 나를 분리해서 볼 때 분열이 생기고 재앙이 닥쳐오는 거지요. 참눈을 가진 사람은 우주를 한 몸으로 봅니다. 또 세상일은 모두 만들어지고(成), 때가 되면 무너지고(壞), 그리고 빈 것으로 돌아가는(空) 과정을 되풀이 합니다. 그래서 풍요롭다가 가난하기도 하고, 좋은 일이 있다가 나쁜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 변화가 올 때 이 고통이 계속 될 거라고 절망하면서 살지만, 심지(心地)가 깊은 사람은 크게 개의치 않고 이 또한 한 순간에 지나가는 것인 줄 알고 지혜롭게 후일을 기다릴 줄도 압니다.”

―사람들이 갈수록 흉포해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원래 인간의 진면목(眞面目)입니까.

“인간의 진면목이야 선하고 밝은 것이지요. 사람이 흉포해지는 것은 우리들 사는 것이 너무 풍요로운 데서 오는 겁니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야 잘 사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사람이 흉포해지는 거지요. 될 수 있으면 채식하고, 분수에 맞게 살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늘 병행해야 합니다.”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출가 직전인 열네 살까지 모친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노장은 출가 후 속가(俗家) 부모님들과의 인연을 끊었다.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담긴 편지도 한 번 읽곤 아궁이에 던졌다. “출가수행자로서는 그게 부모의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물넷에 선방으로 나온 이후 부모 형제들을 위해서 축원 한 번 하거나 향 한 개 꽂은 적 없이 한 평생을 살아왔다”는 대목에서는 ‘비정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노장의 답은 이랬다. “나는 부처님께 양자왔다.”

―효도를 하는 게 불가의 가르침에 어긋납니까.

“결단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출가한 이후 이웃을 위해 봉사할지언정 부모형제를 위해서는 어떤 시주물도 쓰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핏줄이란 차별심은 중생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과 사를 분명히 하는 것이 출가인의 직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무질서한 것은 공사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적 양기스님이라는 분이 총림(叢林)에서 3000명 대중의 살림을 맡은 원주(院主)를 지내면서 호롱불은 두 개만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것도 개인 돈으로 산 호롱불은 위에 놓고 절 돈으로 산 호롱불은 아래에 두고 썼습니다. 기름 한 방울이 떨어져도 공공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공무원의 자세도 이러해야 사회질서가 바로 잡히고 나라가 바로 서는 겁니다.”

노장은 스물한 살 때 금강산 마하연에 조선의 도인들이 모여 산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흰 광목으로 가사를 해 입고 걸망까지 걸친 뒤 짚신을 신고 길을 나섰다가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뜻을 접었다. 남북문제에 대해서도 한 마디 여쭈었다.

―통일이 언제 어떻게 오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행(幸)일까요, 그 반대일까요.

“시기보다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서둘지 말고 통일을 위한 기반을 하나씩 닦아나가야 할 겁니다. 통일에 방해되는 것을 하나씩 줄여가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차츰 회복하면 반드시 통일이 이뤄질 겁니다. 통일이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에 대한 지원에 여전히 말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더 퍼줘야 합니까. 눈 딱 감고 끊어야 합니까.

“보시는 악을 막고 선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말들이 많지만 순수한 인도적 입장에서 볼 때 지원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해야죠. 그러나 대가를 바라지 말고 해야 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지원은 바로 수행의 경지까지로 승화됩니다. 그야말로 보시행(布施行)을 통해 우리의 세계관이 완전히 바뀌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보시바라밀’이 되는 거죠.”

―어려운 시대, 새해 새 아침에 국민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내가 하는 일은 다 옳고 남이 하는 일은 모두 그르다고 생각하는 데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 생각을 자제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좀 인내하면서 살면 자신도, 세상도 두루 평안하리라 믿습니다.”

―서양에선 2012년에 지구에 이변이 생기고 멸망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됩니다. 더 잘 살 겁니다.”

―인류 역사 이래 가장 끈질기게 추구해온 화두가 ‘행복한 삶’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습니까?

“물질과 정신이 적절한 균형을 이룰 때 사람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나’라는 이 몸뚱이가 하루 스물네 시간 존재하는데 대부분 그 실체를 확실히 모릅니다. 그 실체를 알아야 비로소 안정과 평화가 오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묵묵히 꾸준히 밀고 나가면 반드시 도달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치고 살면 복잡해도 한가롭고 평화롭습니다. 누가 금덩이를 가져다주어도 동요하지 않고 옆 사람이 황제가 되었다 해도 부럽지 않습니다.”

―이번에 발간된 스님의 자서전이 곧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된다고 들었습니다. 한국불교가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겠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모두 철저하게 공부해서 각자의 안목을 여는 것입니다.”

노장은 40대에 첫 상좌를 들이기 시작한 이래 상좌 60여 명과 20여 명의 손상좌를 합쳐 80여 명의 권속을 두었다. 제자 중에 그럴싸한 절의 주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손으로 꼽을 정도라는 것이 노장의 은근한 자랑이다. 상좌들에게 제일 많이 한 말이 “화두나 들어”와 “가봐. 밥 먹어”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올 한 해 한국인 모두가 움켜쥐고 살 ‘쉽고 편한’ 화두 하나 주십시오.

“(큰 목소리로) 누구 없는가? (한 참 있다가 다시) 아무도 없는가?”

돌연, 팔공산에서 불어온 매서운 강풍이 문풍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 세찬 바람도 결코 종정 스님의 평상심을 무너뜨리진 못했다. 저런 대선사들 때문에 한국불교가 1700여 년 맥을 이어 내려온 것이리라.

대구=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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