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셰르부르의 추억과 사용 후 핵연료

  • 입력 2009년 7월 24일 20시 22분


어렸을 때 군항(軍港)인 진해에 몇 년 살았기 때문인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군항인 셰르부르는 그렇게 낯설어 보이진 않았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을 연상시키는 낭만은 없었지만 말이다. 지난해 셰르부르 인근 라아그에 있는 재처리 공장을 찾았을 때만 해도 사용 후 핵연료 처리 문제는 남의 일 같았는데 우리나라도 더는 그 문제를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원자력발전소에 있는 사용 후 핵연료 임시저장 시설이 2016년 포화상태에 이른다.

전문가 의견 존중한 프랑스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246가지 치즈를 먹는 프랑스인을 어떻게 만족시키느냐”며 프랑스인의 까다로운 품성과 분열상을 한탄했다지만 프랑스는 원자력 이용과 폐기물 재처리 문제에서만큼은 일치단결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총 59기의 원자력발전소를 보유한 프랑스는 원전발전 점유율이 78%나 되고 여기에서 나오는 연간 1150t의 사용 후 핵연료 중 850t을 라아그에서 재처리해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프랑스원자력재처리공사 아레바(AREVA)의 자크 베스네누 부사장은 프랑스의 성공요인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겐 석유(oil)가 없다. 우라늄도 없다. 그래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프랑스 여건상 원자력 발전이 불가피하고 우라늄도 필요한데 그러자면 사용 후 핵연료에서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추출해 재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약간 맥이 풀렸다. 원전 발전의 부산물인 사용 후 핵연료를 어떻게든 처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가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이 간단한 말에 해답이 다 있다. 그것은 바로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에 대한 존중이다. 현재 기술 수준으로 방사능 위험을 없앨 수는 없다 해도 과학자, 행정가 그리고 갈등조정 전문가들은 현실적 대안을 낸다. 프랑스에선 그것이 ‘재처리’였고 국민과 의회는 그 결론에 동의해주었다. 전문가그룹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갈등 해결이 어려운 것은 전문가가 무시되기 때문이다. 여기엔 인터넷문화로 대표되는 반지성주의뿐 아니라 비겁하게 처신하는 전문가 스스로의 잘못도 크다. 지난해 광우병 촛불시위 사태 때만 해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이에 사이비들이 유포한 정보만 활개를 쳤다. 전문가가 대접을 못 받는 곳에서는 시민단체가 큰 소리를 낸다. 시민단체도 특정 이슈에 대해 상당한 전문성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래야 하지만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특히 동서양을 막론하고 환경단체는 ‘반핵(反核)’을 핵심가치로 한다는 점에서 사용 후 핵연료 문제에 결코 호의적일 수 없다.

핵폐기물 정략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프랑스의 재처리 공론화 과정은 영국이나 캐나다처럼 순조롭지는 않았다. 프랑스 의회는 전문가들이 내놓은 연구결과를 무려 15년 동안 검토해 관리방안을 확정했다. 하지만 정당이 정략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없었다. 원자력 산업은 드골의 우파 정권이 시작했지만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당 정부도 그에 못지않게, 아니 더 적극적이었다. ‘미국으로부터의 에너지 독립’이라는 국민정서가 좌우를 아울렀다.

우리 국회는 합의는커녕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어 프랑스처럼 국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지혜를 모아주길 기대하긴 어려운 것 같다. 대신 우리에겐 ‘부안 사태’라는 소중한 경험이 있다. 2003년 핵폐기물 처리 문제로 지역사회가 갈기갈기 찢어진 사건을 거울삼아 공론화위원회는 가장 적절한 방안을 자신 있게 내놓길 바란다. 그걸 수용하는 건 성숙한 국민의 몫이다.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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