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행복한 1박 2일

  • 입력 2009년 7월 15일 02시 59분


지난 주말은 행복했다. 몇 해를 벼른 끝에 친구들과 시골에 계시는 친구 부모님 댁 두 곳을 방문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고교 동창 일곱은 서울에 계신 부모님들께는 해마다 설날과 추석 때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다. 하지만 시골에 계신 어른들은 몇 번 서울로 모셔 식사를 대접했을 뿐 찾아뵙지는 못했다. 이번 방문은 그래서 그간의 불효를 속죄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시골 부모님 찾아뵌 고교동창

먼저 간 곳은 공무원인 L의 부모님이 사시는 충남 아산시 둔포. 고교 때 친구 일곱이 함께 가 며칠씩 묵고 온 곳이다. 당시 어머님께서 세 끼 식사 외에 떡과 엿까지 챙겨주셨다. 고기와 닭이 오른 푸짐한 밥상을 들여놓으실 때마다 “겅거니가 없어 어떡하나…” 하며 미안해하시던 생각도 난다. 겅거니를 고기반찬으로 오해한 친구들이 “어머님, 고기가 이렇게 많은데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했었는데 나중에 겅거니가 반찬의 충청도 사투리라는 것을 알고 다들 폭소를 터뜨렸다.

읍내에서 30여 분간 비포장도로를 걸어 들어가던 곳이었으나 이제는 국도 45호선이 마을 입구까지 뻗어 있었다. 올해 84세와 83세가 되신 부모님이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 주셨다. 농사를 지으며 공사장 경비로도 일하고 계신 아버님은 “이 나이에 직장에 출퇴근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 자네들도 건강하게 오래오래 일해야 한다”고 당부하신다.

인근 아산온천으로 모시고 나와 점심을 대접했다. 갈비에다 소주 한 병을 거뜬히 드신 아버님은 “일을 놀이처럼 하고, 식사는 일처럼 한다. 그게 건강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말씀하셨다. 단숨에 소주잔을 비우는 아버님께 곱게 눈을 흘기시는 어머니는 “한 번 발동이 걸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 미워 죽겠다. 그래도 이젠 저 영감 없이 혼자는 못 산다”고 말씀해 모두를 뭉클하게 했다.

이어 피부과 의사인 N의 부모님이 살고 계신 충북 옥천으로 향했다. N의 아버님은 교직에서 정년퇴임 하신 후 아무 연고가 없는 곳으로 내려오셨다. 1990년대 초반 친구들이 버스 한 대를 빌려 가족들과 함께 하룻밤 묵고 온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오지나 다름없었으나 주변 환경이 크게 변했다. 어머니께서는 정원에서 직접 수확한 자두와 보리수 열매에다 텃밭에서 캔 쑥으로 만든 떡까지 해 놓고 우리를 맞아 주셨다.

테니스를 오래 치신 아버님은 지난해 말 갑자기 쓰러져 심장수술을 받으셨으나 80세인 지금도 여전히 건강하신 모습이다. 요즘도 오토바이를 타고 군청 소재지에 가 가볍게 테니스 한 게임을 하고 오신다고 하신다. 몸이 약했던 어머니께서는 전원생활을 하셔서 그런지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 모습이다. “아마 서울에 계속 있었으면 벌써 땅 밑으로 들어갔을 거다”라고 해 우리들을 웃기셨다. 그러면서 “아이고 이 사람들아. 친구 부모님 뵙겠다고 여기까지 오느냐…”며 눈시울을 붉히신다.

“한창 때니 많이 먹어야 한다”

집 앞 정원에는 앵두 은행 잣 매실 감 자두나무 같은 유실수가 줄이어 있고, 뒤편 텃밭에는 부추 달래 배추 파 상추 가지 깨 고추 치커리 더덕 두릅 등이 가지런히 자라고 있었다. 두 분이 지난 20여 년간 정성껏 심고 돌보신 것이다. 잠시 땀을 식히고 나니 아버님께서 서둘러 우리를 밖으로 내몰아 자두와 채소를 따게 하신다. “무공해 식품이니 집에 가서 가족들과 나눠 먹으라”는 것이다. 한사코 사양해도 막무가내셨다. 인근 천태산 입구 식당에서 삼계탕으로 저녁을 할 때는 “한창 때니 많이 먹어야 한다”고 권하셨다. 팔순의 아버님께 50대 중반의 아들 친구들은 아직 청소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왜 진작 시골 부모님들을 찾아뵐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부모님들께서는 아들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하셨지만 정작 감사한 것은 우리였다. 자신을 맞아줄 부모님이 여럿 생존해 계신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정말 소중한 1박 2일이었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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