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CSI는 하이힐을 신지 않는다

  • 입력 2007년 8월 2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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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I는 하이힐을 신지 않는다/데이너 콜먼 지음·김양희 외 옮/384쪽·1만 원·뜨인돌

“인간은 거짓말을 해도 증거는 진실만을 말한다.”(미국 드라마 ‘CSI 라스베이거스’ 길 그리섬 반장의 대사)

멋지다. 어떤 난제에도 굴하지 않는다. 세련되고 신속한 과학수사. 그리고 깔끔한 해결. 인물 좋은 건 둘째 치고 패션감각은 어찌나 화려한지. 마이애미 편의 호라시오 반장이 허리에 손을 얹는 ‘카리스마’(국내에선 ‘허리손’ 반장이라 부른다)는 가히 예술의 경지다.

벌써 7년째다. 미국 범죄과학수사대를 다룬 드라마 ‘CSI’ 시리즈에 세계는 열광하고 있다. 국내도 마찬가지. 한 케이블채널에서 24시간 내내 CSI만 튼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저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CSI는 용의자를 신문 안 해요. 바위에선 지문을 못 떠요. 혈흔을 검출하는 루미놀은 금방 푸른빛이 사라져요. 일할 땐 ‘절대’ 미니스커트나 하이힐을 안 신어요.” 왜 산통을 깨냐고? 바로 ‘진짜배기’ CSI의 수사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최근까지 미국 버지니아 주 알링턴과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카운티의 경찰청 과학수사대에서 10년간 일했다.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사건 현장에서 숱한 시체들과 씨름했다. 여성이지만 외모 가꾸기에 대한 관심은커녕 점퍼와 운동화 차림으로 피와 땀에 절어 세월을 보냈다.

현장에 투입된 첫날부터 환상은 깨졌다. 정원에 들어설 때부터 썩은 내를 풍기더니 거실에는 목 없는 시체가 덩그러니. 천장에 돌아가는 선풍기에선 시체 살점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대처 방법은? 1단계, 신문지에 구멍 내 비옷처럼 입는다. 2단계, 비닐봉투로 머리를 감싼 뒤 안전모를 쓴다. 그리고 증거 수집. 멋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었다.

저자는 묻는다. “캐서린(CSI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시체를 헤집다 집에 와 브래지어 안에서 죽은 구더기를 꺼낸 적이 있나. 길 반장이 증거라곤 변기 속 똥밖에 없는 사건에 관심을 가지던가. 시체 살점이나 바퀴벌레 폭포를 뒤집어쓰고 토사물과 정액을 분석하는 게 CSI의 일이다.”

현장만 끔찍한 게 아니다. 매일 밤 초과근무에다 경찰에겐 ‘옴딱지’라며 무시당한다. 가족마저 “식사 중엔 직장 얘기 말라”며 진저리를 친다. 사건 해결에 보탬이 된다는 자긍심이 없었다면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 CSI는 일상마저 고단하다.

10년 만에 CSI를 떠나는 저자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사람들은 언제나 가장 흥미로웠던 사건이 뭔지 물었다. 그때는 대답 대신 내가 했던 일의 중요성과 범죄자를 사회와 격리하는 데 얼마나 일조했는지 생각한다고 말하곤 했다. 과학수사연구소의 끊임없는 규칙들과 초과근무, 제복은 그립지 않지만 친구와 사건, 족적과 타이어 감정은 지금도 그립다.”

기대 이상이다. ‘드라마에 다 나온 거잖아’ 하는 선입관을 여지없이 깨 준다. 거만하지 않고 비하하지도 않는 저자의 태도 또한 맘에 든다. “끔찍한 시체를 놓고 잔인한 농담을 던지는 건 미치지 않기 위해서”란 대목에서는 울컥 하는 느낌마저 든다. 원제는 ‘시체의 손을 빨지 마라(Never suck a dead man's hand).’ 얼어붙은 남성 시체의 지문을 뜨려고 입김을 불다 실수로 “데이트 신청도 안 한” 시체 손가락을 빨게 된 저자의 충고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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