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병일]美, FTA 재협상 요구는 반칙이다

  • 입력 2007년 5월 18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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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일간의 협상 끝에 지난달 2일 극적으로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재협상하자는 미국의 요구가 사실상 전달됐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서울에서 개최된 한 포럼에서 “몇 주 안에 한미 FTA 재협상에 착수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 것으로 보도됐다.

국내문제 실패 타국에 전가

미국은 의회와 최근에 합의한 신통상정책 때문에 불가피하게 재협상이 필요하다고 한다. 미국의 통상정책 변화 조짐은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민주당이 상하원을 장악하면서부터 예고됐다. 금년 7월 1일에 의회가 부여한 무역촉진권한(TPA)이 만료되면 공화당 행정부는 다른 국가와의 FTA는 물론이고, 난파 위기를 겪고 있는 세계무역기구(WTO) 도하라운드를 협상할 근거가 없어져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공화당 행정부는 민주당 의회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미국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재협상 요구는 여러 이유로 타당성이 없다.

첫째, 국제협상의 신사협정 원칙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한미는 양국이 합의한 시한 속에서 협상을 마무리했다. 교환가치의 등가성이 확보되지 않을 때 협상이 타결될 수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미 타결된 협상은 양국이 협상 결과를 수용하겠다는 정치적인 결단을 반영한다. 양국에 공평하게 주어진 시한 속에서 협상을 끝내고, 정식 서명 절차를 기다리는 협정문을 재협상하자는 미국의 요구는 비신사적이다.

둘째, 실패한 국내정치 문제를 외국에 전가하는 무책임한 행위이다. 공화당 행정부와 민주당 의회 간의 통상정책의 향후 방향에 대한 미국 내 조율은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있었다. 미국이 노동과 환경 등의 분야에서 FTA 협정문의 재협상을 요구할 정도로 국내 정치적 합의가 바뀐다면 협상기간에 미국 대표단에 명확한 지침이 전달됐어야 마땅하다. 그때 행정부와 의회 간에 합의하지 못했다면 버스는 지나간 셈이다. 이제 와서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은 입학시험 지원서 제출 마감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접수창구로 와서 내 서류만은 받아 달라는 철없는 아이의 생떼와 같다.

셋째, 상대방 국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주의이다. 미국이 철저하게 국내 정치관계만 고려해 이미 다 끝난 협상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협상하자는 것은 상대 국가의 국민 정서나 정치적인 반응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 후안무치한 처사이다. 미국의 계속된 재협상 요구는 한국민의 반미 감정의 불씨를 되살릴 것이다.

한미 FTA는 반미 정서라는 부담을 안고서 어렵게 진행됐다. 비준을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재협상 요구는 협상 타결 이후 FTA에 우호적인 집단까지 등을 돌리게 할 우려가 크다. 미국이 자국 상황만을 고려해 재협상을 요구하는 모습은 상호이익보다 자국의 잇속부터 챙기고 보자는 이기주의적 태도이다. 협상의 성공적인 타결을 위해 미국이 그토록 강조하던 동반자적 관계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미국의 재협상 요구는 소탐대실의 결과를 초래한다.

이익 급해도 법도는 지켜야

넷째, 미국 내에서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기준을 외국에 강요하는 위선적인 행위이다. 미국이 제시한 국제노동기구(ILO) 기준 다섯 가지 중 미국이 온전히 충족시키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기준을 상대국에 충족하도록 요구하고, 그것을 위반하면 무역보복을 하겠다는 것은 정상적인 도덕률을 가진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주장이다.

미국의 재협상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고 또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답게 상대국의 처지를 잘 헤아려 현명하게 처신해야 한다. 아무리 자국의 이익이 급하더라도 국가 간의 관계에는 지켜야 할 법도와 매너가 있지 않은가.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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