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은령]얼굴이 있는 도시

  • 입력 2007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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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사는 캐롤라인은 내게 봄날의 템스 강을 꼭 보러 오라고 몇 번씩 당부했다. BBC라디오의 프로듀서인 그녀의 ‘진짜 런던론(論)’은 단호했다. “물론 너는 피카딜리 광장에도 서 있고 싶을 거고, 대영박물관에도 들러야 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런던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말하건대, 네가 진짜 런던을 맛보고 싶다면 봄날의 템스 강으로 가야 해. 보트를 타고 흘러가다가 어디든 마음 내키는 대로 내려서 벼룩시장에서 장도 보고 맥주도 맛보는 거야. 그게 진짜 런던이라고….”

6년 전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에서 만났던 그녀가 자랑한 ‘런던의 봄’이 또 온 모양이다. 템스 강 관광정보를 모두 담은 리버템스 홈페이지(www.visitthames.co.uk)에는 이번 주말인 13일 카누부터 동력보트까지 모든 배를 정상 요금의 절반에 탈 수 있는 이벤트가 열린다는 안내문이 떠 있다.

지하철이 있고, 쇼핑센터가 있고, 현금자동지급기가 있고, 바삐 걸으며 휴대전화로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풍경으로만 보자면 서울 뉴욕 런던 파리 도쿄 그리고 지구 반대편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대도시는 모두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거기일 것 같은 메트로폴리스의 얼굴은 숨어 있는 작은 공간들의 발견으로 전혀 다른 인상을 남겼다.

뉴욕 맨해튼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옥상정원에서 바라본 풍경이었다. 6월의 일요일 오후, 그곳으로 나를 데려간 사람은 매일 지하철을 타고 18번가 집에서 42번가 회사로 출퇴근하던 기자 친구 조세핀이었다. 옥상이래야 겨우 5층. 그러나 어떤 기대도 없이 발걸음을 옮긴 나는 눈을 가득 채우는 녹색의 적요 앞에 숨이 멎었다. 미술관을 푹 싸안은 센트럴파크의 녹음, 그 경계선 바깥에 펼쳐진 빌딩들이 오히려 신기루 같았다. “이 도시에서 내가 어떻게 숨을 쉬고 사는지 이제 알 것 같아?” 미소를 지으며 친구는 자랑스러워했다.

멀리서 친구들이 서울로 찾아온다면 나는 ‘이것이 진짜 서울의 얼굴’이라고 무엇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첨단 고층 빌딩, 멀티플렉스, 거대한 쇼핑몰, 고궁, 동대문의 분주한 야시장?

지난 주말 ‘하이서울 페스티벌 2007’ 행사가 끝났다. 2010년까지 관광객을 1200만 명으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운 서울시는 지난해에 비해 행사 기간을 3배로 늘리고 서울이 가진 두 개의 자원인 ‘역사’와 ‘한강’을 테마로 삼아 여러 행사를 벌였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지하철을 타고 지나며 멀리서 바라보던 한강이 시민의 삶 속으로 성큼 들어온 것이다. 시민들은 한강 위에 임시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며 강물에 발목을 적셔 보았다. 조선 정조 반차행렬 재현은 70만여 명의 시민이 지켜봤다니, 구경에 목이 마르긴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도시의 표정은 며칠간의 축제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벤트가 아닌 생활의 일부분으로 숨 쉴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많아질수록 도시는 제 나름의 얼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표정을 갖게 된다.

이 도시를 찾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나는 편도 10차로의 광화문 거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물결을 보여 주고 싶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누구도 지상으로는 건널 수 없었던 그 길에 사람이 넘쳐나며 회색의 도심에 어떻게 삶의 기운이 넘치게 됐는지를….

정은령 사회부 차장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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