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수형]‘오아시스’

  • 입력 2005년 11월 3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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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어느 날 밤. N(50)은 7, 8년 전에 알던 M(35·여)을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M은 1급 정신장애인.

“저녁은 먹었니? 밥 사줄 테니 가자.”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고 여관으로 갔다. N은 M의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켰다. N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M을 애무하다가 두 차례 성행위를 했다.

다음 날 아침. M은 가족들에게 추궁을 당했다. M은 ‘어젯밤 일’을 모두 자백했다. 가족들은 신고했고 N은 체포됐다.

조사가 시작됐다. M이 진술할 때는 보호자들이 늘 옆에 있었다. M이 지능이 낮고 판단력이 떨어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성폭력’ 관련 단체들도 거들었다. M은 “무서워서 N이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N을 구속 기소했다. 혐의는 ‘심신미약자 간음’. 심신미약 상태인 M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 성폭행했다는 것이다.

재판이 시작됐다. N은 혐의를 부인했다. 합의하에 성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올 2월. 1심 판결이 있었다.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 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했고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N은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장은 대전고법의 한기택(韓騎澤) 부장판사. 지난해 후배 판사들에게 ‘목숨 걸고 재판하자’는 글을 썼던 판사였다.

한 부장판사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M은 N을 따라 순순히 여관으로 갔다. 오전 1시 1차 성행위가 끝난 뒤 N이 잠깐 여관을 비웠는데도 M은 도망가지 않았다. 그리고 오전 2시에 다시 성행위를 했다. M은 지능은 떨어졌지만 기본적인 판단능력은 있었다.

한 부장판사는 M을 판사실로 불렀다. 한 부장판사는 M을 달래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고 했다.

M에게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N은 좀 착한 사람 같았어요.” 한 부장판사와 M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것 할 때…스트레스가 풀렸어요…. 상쾌하고 기분도 좋았고요….”

N과 같이 있었던 것이 M에게는 ‘오아시스’였던 것이다.

M이 두려워한 것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었다. M은 ‘그 짓’을 하면서 ‘엄마한테 혼날까 봐’ 걱정됐다고 말했다. 그런 짓 하면 주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다시 정신병원에 넣을까 무서웠다고도 했다.

7월 말. M의 이야기를 한 부장판사는 더 들을 수 없었다. 휴가 여행에서 심장마비로 숨졌기 때문이다. 나머지 이야기는 배석판사들이 들었다.

11월 18일. N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내려졌다. 무죄였다.

이 사건에서 정작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하는 것은 어쩌면 M을 둘러싼 ‘정상인’들인지 모른다. M이 ‘강간당했다’고 진술해 주기를 바랐던 사람들, M에게도 ‘상쾌하고 기분 좋을’ 본능과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 M의 인생을 자신의 체면과 명분으로 바라본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위선’ 또는 ‘오만’이라는 난치(難治)의 장애가 있는 진짜 장애인인지도 모른다.

이수형 사회부 차장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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