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못기다려” … 툭하며 가처분신청

  • 입력 2005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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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가 빨라진 현대인에게 법의 속도는 느리기만 하다. 몇 개월에서 길게는 해를 넘겨야 판결이 나온다. 하루가 급한 사람들에게 이런 판결은 너무 멀다. 그래서 이들은 판결로 해결되는 정식 소송 대신 가처분제도를 선호한다. 가처분사건은 보통 접수 후 1주일 안에 결과가 나온다.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접수된 가처분사건을 통해 한국사회의 ‘속도전’, 그 단면을 살펴본다.》

가처분사건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사회가 빠르게 변하면서 급하게 해결을 구하는 가처분사건도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다.

‘가처분’ 앞에는 공사 금지, 주주총회 금지, 통행방해 금지, 저작권·상표권·특허권 침해 금지, 배포 금지, 전기공급계약해지 금지 등 다양하고 화려한 수식어가 붙었다.

▽인간관계도 ‘급하게’ 해결=인간관계까지 ‘급하게’ 해결해 달라며 가처분 신청을 내는 사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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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30대 남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상대로 ‘접근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하자 어머니가 그에 대한 원망으로 수시로 자신의 집을 찾아와 욕설과 행패를 부려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며 어머니가 자신과 부인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아 달라는 신청이다.

담당 판사는 “어머니를 ‘하루라도 빨리’ 법으로 막아 달라는 신청 내용을 보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상속 재산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는 형제간에도 가처분이 이용된다. ▽연예인에서 스님까지… ‘바쁘다 바빠’=바쁘기로 유명한 연예인의 이름도 가처분사건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소속 연예인이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대형 기획사로 옮겼다며 방송출연 금지 조치를 긴급히 내려달라는 가처분이 많다. 재판부는 기획사가 입은 손해는 나중에 해당 연예인이나 옮겨 간 기획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 해결될 여지가 많다며 이 같은 가처분 신청을 대부분 기각한다. 그러나 기획사는 ‘철새 연예인’에 대한 괘씸함 때문인지 이 같은 가처분 신청을 끊임없이 낸다.

MBC는 탤런트 최진실 씨에 대해 전속계약에 따른 출연이 완료되기 전에 다른 방송에 출연했다며 출연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가 취하하기도 했다.

‘느림의 가르침’을 줄 것 같은 스님도 ‘바쁜’ 소송 대열에 합류했다. 최근 봉은사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문화센터에서 예식장 영업을 하지 말라며 D건설과 예식장 운영업자를 상대로 영업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기업 법률분쟁도 ‘가처분’부터=경영권 분쟁에서도 가처분 신청은 단골메뉴다. 국내 최대 저축은행인 HK상호저축은행을 놓고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최대주주와 2대주주는 6개월 사이 임시주총 소집 금지, 의결권행사금지 등 모두 16차례의 가처분 신청을 냈다.

주주총회 시즌에는 주총을 2, 3일 앞두고 주주총회소집 금지 신청이 들어오기도 한다.

▽끝나지 않는 분쟁=가처분으로 분쟁의 종지부를 찍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본안소송으로 넘어간다.

고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외아들 지만(47) 씨는 10·26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박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올 1월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법원은 “영화 일부를 삭제하고 상영하라”고 결정했지만 영화제작사는 가처분이의신청을 냈다.

그후 10개월에 걸친 법원의 조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 씨와 영화제작사 측은 합의를 못해 결국 상대방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으로 결판내게 됐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경제 어려울수록 가처분제도에 호소▼

경제의 주름살이 깊어지면서 가처분제도에 의지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법원행정처가 발간하는 ‘사법연감’에 따르면 1994년 5만여 건에 불과했던 가처분사건 접수 건수(전국법원 통계)가 1997년 10만1864건, 1998년 11만1004건, 1999년 10만5596건으로 외환위기 전후 3년간 10만 건을 웃돌았다.

이후 접수 건수가 2000년 9만 건 수준으로 줄어든 뒤 2001년 8만4150건, 2002년 8만5918건, 2004년 8만6702건 등 8만 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가처분사건을 다루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의 전휴재(全烋在) 판사는 “외환위기 전후에 가처분사건 수가 늘어난 것은 가계 빚의 증가로 재산권과 관련된 가처분사건이 많이 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가처분사건은 분쟁 중에 있는 권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임시로 정하는 가처분과 소송의 다툼이 되는 물건, 즉 계쟁물(係爭物)에 대한 가처분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권리의 임시지위를 정하는 가처분은 의결권금지, 자녀인도청구, 면접교섭 등이 있는데 주로 주주(株主)나 부부(夫婦), 혹은 노사(勞使) 간 등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 많다.

반면 계쟁물에 대한 가처분은 공사중지, 명도이전, 사해(詐害) 행위 취소 등 재산권에 관한 사건이 주를 이룬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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