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어떤 惻隱之心

  • 입력 2005년 11월 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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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C일보 기자였고, 갓 정치부에 배속된 ‘신참 기자’였던 것 같다. 어느 잡지에서 그가 5공 민정당을 출입하던 첫날의 흥분을 적어 놓은 걸 봤다. ‘마치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한편으론 실소(失笑)를, 또 한편으론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무시무시한 블랙홀이 빛까지 삼켜 버리듯 무소불위의 권력은 젊은 기자의 의식마저 이렇게 뒤틀어 놓는구나’ 하는 생각에 입맛이 썼다. 당시 민정당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것 빼고는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던 권부(權府)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나도 뭐 그리 달랐을까 싶다. 민자당을 취재하던 시절, 필자는 농담처럼 “나는 펜으로 국가와 민족에 봉사한다”고 말하곤 했다. 말은 농담처럼 했지만 실은 진심이었다. 필자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다짐하곤 했다. 그런 필자를 보며 어떤 사람들은 썰렁해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의식의 굴절을 읽어 내기도 했을 것이다.

루이스 리비라는 사람에게서도 뭐랄까 ‘의식의 불구(不具)’ 같은 게 느껴진다. 지금 워싱턴을 뒤흔들고 있는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 신분 누설 사건(리크게이트)으로 법정에 서게 된 인물…. 실세 중의 실세라는 사람이다. 근착(近着) 뉴스위크 스페셜 리포트에 실린 ‘리비 스토리’를 보면서 더더욱 그런 사념(思念)에 빠져들었다.

‘멘 오브 실버(Men of Silver).’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말한 영혼의 세 계급, 금 은 납 계급 가운데 돈과 명예보다 오직 국가에 대한 봉사만을 생각하는 이상적 수호자다. 플라톤이 갈구했던 아테네의 수호자들이다. 9·11테러 직후 리비가 한 언행을 추적해 보면 그가 바로 이 ‘멘 오브 실버’를 꿈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 높은 소명(召命·Calling)에 봉사하는 사람은 보통의 규범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의식으로까지 나아갔다는 게 뉴스위크의 분석이다.

뉴스위크는 여러 가지 키워드를 동원해 리비의 궤적을 쫓고 있지만, 사실 권력자의 주변에서 이런 의식의 소유자들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입신양명을, 그 입신양명을 보장해 줄 최고 권력자에 대한 봉사를 ‘이상 국가의 수호 임무’라고 착각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

플라톤까지 들먹이지는 않았지만, 우리 주변에도 ‘리비의 아류(亞流)’가 적지 않았다. 수준이 좀 낮긴 했지만…. 그들은 이를테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가 마치 우리 국민이 이루어낸 ‘최고선(最高善)’인 양 수호천사를 자임하고 나섰다. 그들만이 ‘어 퓨 굿 멘(A Few Good Men)’이었다. ‘최고선’을 호위하는 사람들은 ‘보통의 규범’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정권이 끝난 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보통의 규범이었다. 영화 ‘어 퓨 굿 멘’의 잭 니컬슨처럼 그들은 하나 둘씩 법정에 서야 했다.

가을 탓일까. 요즘 따라 부쩍 그런 사람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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