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칼럼]참회록을 써야 할 사람들이…

  • 입력 2005년 8월 23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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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불신 풍조가 갈수록 병세가 깊어지는 듯하다. 가령 권력자가 단호한 어조로 “한 점 의혹 없이…”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정치권이 또 뭔가 꾸미는 사기극의 서막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몰락한 재벌 총수가 분식회계 죄목으로 구속됐을 때 적지 않은 시민들은 “정권에 밉보여 괘씸죄에 걸렸을 뿐”이라고 여긴다. TV에 연예인 커플이 출현해 부부애를 자랑하면 시청자들은 “저 사람들 머잖아 이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식의 예상은 신기하게도 잘 들어맞아 왔다. 우리 사회를 제대로 읽는 요령들을 터득해 온 때문이다.

국가기관의 도청 사건, 두산그룹 분쟁, 박철언 회고록 등에 대해서도 거개의 시민들은 밝혀지는 내용에 놀라기보다 부정하고 싶었던 짐작들이 가시적으로 확인된 데 대해 스스로 분노하는 모습이다. 이런 사건의 주인공들이야말로 불신 풍조의 주범으로 우리 사회를 냉소적으로 만들고 국민들에게 좌절감을 준다는 점에서 법적인 죄보다 국가에 정신적으로 끼친 해악이 훨씬 크다고 하겠다.

국내 최고(最古) 재벌의 전통과 명예도, 피를 나눈 형제간의 우애도 돈 앞에 모두 팽개쳐 버린 두산그룹 오너들의 자해 폭로전은 이 그룹을 분식회계나 일삼고,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수백억 원의 비자금이나 만들며, 오너들에게 증자대금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초대형 구멍가게 수준의 기업’으로 스스로 격하시켰다. 곧은 발언을 자주 해 ‘재계의 미스터 쓴소리’로 불리던 박용성 회장은 2004년 초 교사들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아직도 능력 없는 자식들에게 회사를 넘겨주거나 기업을 개인회사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목청을 높였는데 바로 그 시절 두산그룹은 이미 아들들이 경영수업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가족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을 이사회에 ‘하달’하는 지극히 ‘개인회사적 지배구조’를 키우고 있었다. 그는 “기업이 고비용 정치구조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정치권을 비판했지만 막상 이 회사의 근로자와 주주 그리고 소비자들은 두산그룹 ‘고비용 지배구조’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가 남보다 자신에게 ‘쓴소리’를 더해 왔다면 두산그룹이 오늘날 이런 운명을 맞았을까.

세상이 뒤숭숭하니 이 사람까지 나서는가. 박철언 전 의원의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이란 회고록에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많다. 대법원장 후보들이 그를 만나 충성서약을 했다는 주장은 사실일까. 아무리 그 자리가 탐났다 한들 명색이 법관인데 정말로 그랬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 의원을 “천주님께 맹세코” 차기 대권주자로 언질 줬다는 부분이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대권을 주기로 정식 통고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마룻바닥에서 큰절을 했다는 내용도 사실이라면 이 바닥에서 큰사람을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절감케 한다.

그런데 이 회고록을 쓴 박 전 의원은 과연 누구이던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지만 당시 권력의 황태자로 불리던 이 사람 때문에 빚어진 정치파동이 어디 한둘이었나. 당시 언론보도는 그가 권력 2인자, 혹은 ‘물통령’ 위의 진짜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가 권력을 사유화한 실세였으며 그의 막강한 힘을 배경으로 한 추종자 집단도 이권에 개입하는 등 세도를 부리다가 비난 속에 해산됐다고 전한다. 출옥하던 날 “분노와 통한은 감옥에 다 묻고 나왔다. 이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조용한 봉사의 생활을 갖겠다(회고록2-421쪽)”고 결심했던 그는 조용히 세상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든지, 아니면 (굳이 뭔가를 써야 했다면) 교만을 뉘우치고 과오를 고백하는 참회록을 썼으면 어땠을까.

‘뭐 묻은 개’ 격의 사람들끼리 남의 흉 들춰내며 벌이는 사나운 싸움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들의 위선, 그리고 추악한 거래들은 근래 우리 역사에 끊임없이 기록되어 왔고 한국사회의 한 특성처럼 자리 잡았다. 그 주인공들이 더럽힌 이 강산의 공기 속에서 살아야 하는 시민들의 자괴감을 씻어 주는 것, 갈등으로 황폐해진 사회정서를 순화하고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회복시키는 것, 그리하여 이 나라를 정신적으로 재건하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이 땅의 지도자들이 힘 기울여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경제 발전도 그런 올바른 정신적 바탕 위에 이뤄져야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이규민 경제大記者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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