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선한승]무너진 화이트칼라의 꿈

  • 입력 2005년 8월 20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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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더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때 일할 욕구가 생긴다.

사회학자는 이를 ‘계층의 이동’으로 설명한다. 열심히 해도 계층의 상향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믿을 때 인간은 자포자기에 빠진다. 지금 우리나라는 사무직이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패널 조사에 따르면 5년 동안 사무직 종사자 2명 중 1명 정도가 실직했거나 하위 직군으로 추락했다. 당시 실업자의 절반이 지금도 실업자 신세를 면하지 못한 것으로 분석됐다. 사회의 중추인 중산층으로 분류되는 사무직의 추락은 사회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본 조사 결과가 갖는 함의는 ‘중산층의 경우도 한번 빈곤의 사슬에 걸리면 회복 불능의 상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국도 남미처럼 이른바 빈곤문화(poverty culture)가 고착될 수 있다는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런 사태를 방치했다가는 어떠한 정책적 수단도 소용없는 무기력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이 지경까지 가지 않도록 정부 당국은 한시바삐 손을 써야 한다. 사회 안전망을 촘촘히 구축해 사각지대를 없애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용안정 대책이 우선이다. 다른 나라도 우리와 같이 경제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처럼 사회 근간을 흔들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우리 노동시장의 경직성에서 일차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직장을 잃어도 대체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다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화이트칼라의 ‘재취업 시장’은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 또 고용 형태의 다양성 수준이 매우 낮고 정규직에만 매달리고 있다.

둘째, 영미 등 선진국 기업에서는 경영상의 이유로 감원을 해도 일시해고(layoff)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언제든지 기업이 정상화되면 재고용(recall)을 한다. 하지만 우리 기업은 내보낸 근로자를 재고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셋째, 고실업 사회로 분류되는 유럽에서는 다양한 직업훈련 제도를 통해 몸값을 높인다. 실업 기간을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하는 재충전 기회로 만드는 것. 그리고 직업훈련 기간에는 훈련수당을 주어 생계를 보장한다.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부문의 시스템이 매우 취약하고 더구나 사회 안전망까지 허술하기 때문에 실업자로 전락하게 되면 끝없는 추락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나라가 1960, 70년대 고도성장기의 역동성을 회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 빈곤문화가 고착되지 않도록 계층의 하향 이동을 막는 고용안정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 기업, 노동자 모두 발상의 대전환을 해야 한다. 정부는 고용안정기관의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장기 실업자 전담 공무원제를 통해 적극 대처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공공직업안정기관을 통해 취업하는 비율은 선진국의 3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으로 기업은 경영상 불가피하게 해고할 경우에는 퇴직자 프로그램을 상시화하고 재고용제를 확대 실시해야 한다. 지금과 같이 막무가내로 대책 없이 종업원을 거리로 내몰면 누가 직장을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인지를 자문해 보기 바란다.

빈곤의 악순환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근로자 자신이 져야 한다. 주5일 근무제 실시로 늘어나는 여유시간을 자신의 능력 계발에 투입하는 자기관리가 중요하다. ‘혹독한 구조조정기에도 전문 직종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봤다’는 이번 조사 결과를 사무직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선한승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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