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안경호와 안병수, 그리고 정동영

  • 입력 2005년 8월 2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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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민족대축전 최대의 수수께끼는 북한 대표단의 국립묘지 참배였다. 왜 참배했을까. 해석들이 분분하지만 북한을 정말 잘 아는 전문가들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남한 정부의 서훈(敍勳)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남북 간 정통성 경쟁 속에서 남측이 좌파 독립투사들까지 끌어안자, 북측도 서둘러 우파를 수용하는 모양새를 보였다는 것이다. 독립과 건국의 뿌리가 북에 있다고 믿는 그들로서는 그렇게라도 대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김기남(79·노동당 비서) 북측 당국대표단 단장도 참배에 앞서 “(남쪽에도) 조국 광복에 생을 바친 분들이 있어서 왔다”고 했다. 6·25전쟁 전사자(戰死者)들에 대한 추모가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북한의 치밀함과 집요함이 대체로 이렇다.

부끄럽게도 나는 처음엔 ‘안경호’가 ‘안병수’인 줄 몰랐다. ‘북측 민간대표단 단장 안경호’라고 하기에 차세대 대남(對南) 일꾼이려니 했는데, 웬걸, 그가 ‘안병수’였다. 안병수(75)가 누구인가. 1973년 제1차 남북조절위 수행원으로 출발해 1988∼90년 남북 국회회담 준비접촉 대표, 1990∼94년 고위급회담 대표 겸 대변인을 지낸 북한 최고의 대화 일꾼 아닌가. 입심 좋기로 유명한 그가 ‘안경호’가 돼서 나타난 것이다. 북측 인사들이 흔히 가명을 쓰는 것처럼 그도 그동안 ‘안병수’로 행세하다가 이번엔 본명으로 온 것이다.

그렇다면 남측에선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어야 했다. “선생은 이제 보니 안병수가 아닌가. 조평통 서기국장 안병수라면 김정일 정권의 1급 대남 일꾼인데 어떻게 민간대표가 됐는가. 당신이 8·15축전 성격에 맞다고 보는가.” 그러나 그런 질문은 없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목하 ‘민족공조’ 중인데 누가 그런 불온한 질문을 할까.

어디 안경호뿐인가. 북측 자문위원으로 온 임동옥(68) 조평통 부위원장도 ‘임춘길’이란 이름으로 20년 넘게 대남정책을 총괄해 온 대화꾼이다. 1990년 12월 제3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열렸을 때도 그의 직함은 자문위원이었다. 당시 그가 우리 측 관계자들에게 “나는 장관급이니 그에 맞는 예우를 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남측 언론이 그를 ‘실세(實勢)’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북측 적십자회 부위원장으로 온 최성익도 1990년대 초반 고위급회담을 위해 여러 차례 서울에 왔던 대화꾼이다. 이렇게 보면 김 단장을 제외하고 북한의 내로라하는 대화꾼들이 총출동한 셈이다(노동신문 주필을 지낸 김 단장은 선전 선동술의 권위자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고 갔을까.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 대표단이 남한 사회를 흔들어 놨다지만 그들이 남한 사회로부터 받은 충격도 작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프로 중의 프로’라는 이 대화꾼들이 과연 충격을 받았을까. 남쪽의 자유분방함에 놀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수구 꼴통이 잔칫집에 재 뿌린다”고 할지 모르나 나 역시 대북(對北) 포용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북한의 상투적인 대남 선전 선동도, 그것이 그들의 자존심 지키기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속더라도 알면서 속아야 한다.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담긴 뜻과 의도를 정확히 읽을수 있어야 한다.

꼬투리를 잡는다고? 그럼 이런 지적은 어떤가.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김 단장은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께서 노무현 대통령 각하께 보내신 인사를 전해드린다”고 인사했다. 어느 나라 대표가 상대국 국가원수를 예방한 자리에서 자국(自國) 원수를 가리켜 ‘경애하는…’ 식의 극존칭을 쓰는가. 이는 반북, 친북을 떠나 국가의 존엄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도 누구도 이를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남북 화해 협력이라는 시대의 강물은 이미 도도해져서 거스르기 어렵다. 거스르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적어도 이 정권의 누구 한 사람쯤은 꼬투리를 잡아야 한다. 제대로 된 국가라면 통일부 장관이 마땅히 그 일을 해야 할 텐데 그는 ‘신라의 달밤’에 취해버렸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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