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속의 오늘]1863년 佛 화가 들라크루아 사망

  • 입력 2005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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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연 화약 연기를 배경으로, 시신을 넘어 돌진하는 분노한 민중. 그 한가운데 우뚝 서서 민중을 독려하는 여성.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작품 모습이다.

가장 위대한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로 꼽히는 들라크루아는 1863년 8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파리 근교에서 태어난 그는 나폴레옹의 약탈 문화재와 미술품으로 가득한 루브르박물관을 드나들며 미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루브르의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그는 고대의 문학과 역사에서 예술적 영감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하지만 고전적인 미를 복구하기보다는 낭만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역사에 갇히지 않는 자유분방한 상상력, 자아의 해방을 존중한 것이다. 색채는 화려했고 분위기는 관능적이었다.

1830년은 그의 미술 인생에 있어 획기적 전기였다. 그는 왕당파를 무너뜨리기 위한 1830년 7월혁명의 모습을 캔버스에 옮기기로 했다. “내가 조국을 위해 직접 싸우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조국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는 있을 것이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바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면서도 철저하게 낭만적이다. 어둡고 무거운 배경과 밝게 빛나는 주인공의 색채 대비, 강렬하고 역동적인 여성의 몸짓, 가슴을 살짝 드러낸 여성의 관능미 등. 이런 점들은 투쟁의 역사를 그린 작품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새롭고 과감한 시도였다. 혁명의 정치적 의미보다 자유정신 그 자체를 찬미하려했던 들라크루아의 예술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1832년 프랑스 정부는 이 작품을 사들여 뤽상부르 미술관에 전시했다. 그러나 1839년 “민중 봉기와 관련된 그림을 모두 철수하라”는 정부의 명령이 떨어져 전시실에서 철거되고 말았다. 그리고 1848년 2월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뤽상부르 미술관 전시실로 되돌아가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어쨌든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을 통해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았다.

1840년대 이후 그의 관심은 자연으로 옮겨갔다. 역사와 현실에서 한 발 물러나 숲과 해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1850년대 중반부터 몸이 쇠약해졌고 1863년 뜨거웠던 미술 인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 후반기, 자연을 그린 작품 역시 자유분방하고 대담했다. 낭만주의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다. 그는 끝까지 낭만주의자였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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