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71>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5월 31일 03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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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아니 됩니다. 사자를 죽이는 법이 아니거니와, 형양성 안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도 사자는 살려 보내야 합니다. 사자가 돌아가 우리가 속지 않은 것을 성안에 전함으로써 저들을 더 큰 두려움에 떨게 하게 하십시오.”

범증이 그렇게 패왕 항우를 말렸다. 이에 다시 육고(陸賈)를 부른 패왕은 성난 목소리를 감추지 않고 꾸짖었다.

“마땅히 너를 죽여 과인을 속이려 한 죄를 물어야 하나, 명색 사자라 목숨은 살려준다. 돌아가서 유방에게 전하라. 내 사흘 안으로 형양성을 떨어뜨려 배은망덕한 유방을 사로잡고 지난날 홍문(鴻門)에서 붙여 보낸 머리를 반드시 그 어깨에서 떼어놓으리라고.”

겁을 먹은 육고가 목을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돌아와 패왕의 말을 전하자 기대에 차서 기다리던 형양성 안은 갑자기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했다. 장량은 자신의 꾀가 듣지 않자 소태 씹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고, 장량만 믿고 있던 한왕 유방도 무거운 한숨만 쉬었다. 장수와 막빈(幕賓)들도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앞날을 걱정했다.

그런데 오직 한사람 호군중위(護軍中尉) 진평(陳平)만은 다른 이들과 달랐다. 쫓겨 온 육고가 패왕의 으름장을 부풀려 전해도 차게 비웃을 뿐, 겁내는 기색이 없었다. 그걸 알아본 한왕이 진평을 불러놓고 넌지시 물었다.

“천하가 이처럼 어지러우니, 어느 때가 되어야 안정될지 모르겠소.”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누가 어떤 사람을 얻고 부릴 수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군주라도 사람을 바로 얻지 못하면 혼자서는 결코 천하를 평정할 수가 없습니다.”

진평이 묻기를 기다린 듯 그렇게 대답했다. 한왕이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물었다.

“진(陳)호군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어떻게 해야 사람을 바로 얻는 것이 되오?”

“항왕은 사람됨이 남을 공경하고 인정이 많아 청렴하고 지조 있으며 예절을 좋아하는 선비들이 그에게로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공을 쳐주고 상을 베푸는 일과 작위를 내리고 봉지(封地)를 갈라주는 데는 인색하여, 제후로 삼고도 그 도장 모서리가 닳아빠지도록 관인(官印)을 내주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 때문에 일껏 항왕을 따라나선 선비들도 온전히 그의 사람이 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오만하시고 예의를 가볍게 여기시어 청렴하고 절개 있는 선비들은 대왕께로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땅을 떼어주는 데는 아낌이 없으시니, 청렴과 절개를 돌아보지 않고 이익 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선비들이 많이 대왕을 찾아와 따르고 있습니다. 만약 초나라와 한나라 양쪽의 잘못됨을 버리고 바른 것을 따른다면 이는 사람을 바로 얻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바로 얻으면 손 한번 휘젓는 것만으로도 쉽게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한왕은 진평이 말하려는 바를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잠깐 진평의 얼굴을 살피다가 다시 물었다.

“공의 말이 그르지 않음은 알겠으나, 강한 적에게 에워싸여 궁색한 성안에 갇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과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듯하구려. 이제 와서 어떻게 사람을 불러 모으고 써야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단 말이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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