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황호택]5월의 금강산

  • 입력 2005년 5월 17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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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금강산을 다녀왔다.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금강산으로 가는 육로 관광길은 그 자체로 긴장감이 감도는 안보관광 코스였다. 온정리(溫井里)의 온천욕장과 교예단 공연이 열리는 문화회관은 남쪽의 관광객들로 붐볐다. 남측의 중부푸드뱅크가 투자한 ‘고성항 횟집’에선 북한 어부들이 잡아 온 자연산 회를 팔았다. 골프장과 가족호텔 공사도 진행되고 있었다. 육로 관광이 열리면서 적자투성이였던 금강산 관광이 자리를 잡아 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튿날 구룡폭포와 상팔담(上八潭)으로 산행을 했다. 금강산의 승경(勝景)은 자연의 위대한 예술품이다. 조선시대 이래 수많은 문사들이 다투어 기행문을 남긴 금강산 경치를 이 짧은 글에서 다시 묘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다.

구룡폭포 가는 길에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칭송하는 글을 새긴 ‘구호(口號) 바위’를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김 주석의 부인(김정숙)과 아버지(김형직) 어머니(강반석)의 이름을 판 구호 바위도 있다.

구룡폭포가 떨어지는 통바위에는 대한제국 말의 서화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이 1919년에 새긴 길이 19m의 ‘彌勒佛(미륵불)’ 석 자가 선명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는 3년 뒤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에서 “이것이 지워지려면 몇천 년을 지나야 할 것이니 해강은 금강산에 큰 죄를 지었다”고 비판했지만 지금은 세월의 때가 묻어 주변 경치와 어울렸다. 관폭정(觀瀑亭) 옆에는 “김 주석이 ‘彌勒佛’ 글씨도 문화재이므로 잘 보존하라는 교시를 남겼다”는 표지판이 서 있다.

‘彌勒佛’ 글씨와 달리 구호 글씨는 너무 크고 많고 예술성이 떨어져 세월이 흘러도 금강산의 흉터로 남을 것 같았다. 금강산에만 4000여 개의 구호바위가 있다. 일행은 북쪽에서는 말조심하다가 남쪽으로 내려온 뒤에 하나같이 구호바위를 탄식했다.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 3권에 ‘금강예찬’을 쓴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복원 기술이 발달해 통일 후에는 금강산 바위를 모두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더라도 몇 개는 남겨 두어 후대에 경계(警戒)로 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날에는 해금강과 삼일포를 찾아갔다. 해금강으로 가는 길은 도로 양쪽이 펜스로 둘러쳐져 있었다. 교차로와 마을이 나타날 때마다 북한군 군관들이 관광객 버스가 지나가는 동안 경비를 섰다. 자전거를 타고 오던 여성은 현대아산 버스 10여 대가 나타나자 자전거에서 내려 건물 뒤로 모습을 숨겼다. 냇가에서 낚시질을 하던 주민들도 버스 반대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논에서는 농부들이 붉은 기를 꽂아 놓고 소로 쟁기질을 했다.

남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관광객 한 명이 배낭에 돌을 숨겨 가지고 나오다 북측의 검색에 걸려 출발이 10분가량 지체됐다. 북측 출입관리사무소(CIQ) 옆 호수에는 두루미 한 마리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북한군 막사 옆에서 사병이 빨래하는 모습도 보였다.

올해는 금강산 관광객이 80만 명에 이르리라는 예상이다. 북측 CIQ 직원이 관광증에 스탬프를 찍다가 “남쪽에는 금강산에 올 사람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라고 묻더라고 남측 안내원이 전했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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