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對국민 서신’ 다시 써야 할 대통령

  • 입력 2005년 4월 18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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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中日) 갈등이 심각하다. 양국 외무장관 회담까지 열렸지만 해소될 기미가 안 보인다. 중국의 반일(反日) 시위는 문화혁명 이래 최대 규모라는 얘기도 나온다. 중일의 충돌은 노무현 대통령이 펴는 ‘동북아 균형자론’의 적실성 여부를 따져볼 수 있는 첫 시험대가 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균형자론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가 아니라, 중일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격화되고 있는 양국 갈등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아니, 그런 역할이 가능하기는 한가.

균형자론이 정부의 설명대로 ‘전략적 비전’이어서 구체적 사안에 적용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자꾸 하는 것은 균형자론이 우리 현실에 맞는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념 논쟁과 정책 토론이 이 시대의 공적 오락(public entertainment)이 된 지 오래지만 ‘균형자론’은 국민이 원했건 안했건 좋은 학습 기회이기도 하다.

▼中日충돌은 ‘균형자론’ 시험대▼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중일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없어 보인다. 정부는 그 흔한 성명 하나 못 내고 있다. 이유는 자명하다. 그럴 힘도 없을뿐더러 사안 자체가 너무 복잡해 쉽게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만 놓고 본다면 같은 피해자로서 중국의 손을 들어줘야겠지만 중국은 고구려사를 유린한 나라다. 그것도 중앙 정부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날조했으니 이런 중국에 어떻게 동조하겠는가. 그렇다고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 편을 들 수도 없으니 난감할 뿐이다.

역사 문제가 이럴진대 영토, 안보, 군비 증강처럼 국운이 걸린 사안이라면 오죽할까. 섣불리 균형자를 자처했다간 누구 칼에 맞을지 모른다. 가만히 있어도 “중국의 반일 시위는 한국이 자극했다”(일본 마이니치신문 15일자)는 소리를 듣는 판이다.

지금으로선 사태를 주시하면서 미국이 나서 주기를 기다리는 게 상책이다. 미국은 그럴 힘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이 일제(日帝) 피해국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서두르자 제동을 걸었고, 중국 정부가 반일 시위를 방조하는 듯하자 국무부의 유감 성명을 통해 제동을 걸었다. 말 그대로 균형자 역할을 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의 한계는 분명해진다. 미국이 진정한 의미에서 동북아시아의 균형자라면, 우리는 한미동맹의 틀 안에서 존재하는 ‘보조 균형자’인 것이다. 동북아의 세력 균형 체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하드웨어 즉, 힘의 정치(power politics)는 미국이 맡고 그 안에서 신뢰와 우의를 다지는 소프트웨어 즉, 신뢰구축(confidence building)은 한국이 맡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한미 간 역할 분담이 균형자 논쟁의 본질이라는 얘기다.

‘보조 균형자’라 해도 할 일은 많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처럼 민관(民官)이 함께 참여하는 ‘동북아 안보대화’ 창설을 주도하거나, 아니면 요즘 각광받고 있는 인간안보(human security) 연구를 위한 동북아 협의체 등을 만들 수도 있다. 이런 준(準)안보 기구들을 통해 이 지역의 긴장을 완화해 나가는 것이 동북아의 역학관계나 우리의 국력, 국민 의식, 외교관들의 자질 등을 고려할 때 ‘가능한 최선책’이 아닌가 한다. 이런 일들을 충실히 해 나가다 보면 진짜 균형자 역할을 할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美의 보조균형자 역할이 현실▼

노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균형자론을 재정리해서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균형자’라는 용어부터 바꿔야 한다. 진지한 고민도, 외교적 상상력도 없이 불쑥 던진 한마디 때문에 국민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가. 한미관계에 끼친 부정적 영향은 계량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심정을 밝히는 ‘대(對)국민 서신’을 직접 써서 인터넷에 띄웠다. 이제야말로 대통령이 두 번째 ‘대국민 서신’을 써야 할 때다. 애꿎은 참모들만 균형자론을 해명한답시고 이런 말, 저런 말 하고 다니는 것은 보기에도 딱하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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