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한국의 뉴턴? "저요 저!"

  • 입력 2003년 12월 18일 16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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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5일 144명의 학생이 ‘부산 과학영재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새로 제정된 ‘영재교육진흥법’에 따라 국내 최초로 국가 차원의 과학영재 교육을 위해 설립된 특수학교.

독자적 선발방식, 학점제 수업운영, 한국과학기술원(KAIST) 특례입학 보장 등 기존 고등학교와는 완전히 다른 체제로 신입생 선발 당시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로부터 9개월여. 2학기가 거의 끝나가는 이 학교에서 ‘영재’들은 어떻게 키워지고 있을까?

딱딱한 과학 시간에도 인상을 찡그리거나 어려워하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어려운 영어 원서를 읽으며 대학생 수준의 연구 활동을 하지만 꿈만은 티없이 맑은 소년 소녀들이다. 이들이 수업시간에 사용하는 원서 교재는 calculus(미분학), physics(물리학), biology(생물학) 등 대학에서나 볼 수 있는 책들이다.

○ 공부가 왜 가장 쉬워요?

“오픈 인터벌에서 크리티컬 넘버를 찾으면….”

“오존의 미분값이 최대 최소니까 크리티컬 넘버가….”

“맥시멈하고 렐러티브 맥시멈의 차이가 뭐야?”

수학 시간이 시작되기 직전 쉬는 시간. 승병이(17) 자리에 서 너 명이 모여 암호 같은 문제를 둘러싸고 토론을 벌인다. 주변 아이들도 토론에 하나 둘씩 가담해 어느새 열명 가까이로 늘어났다.

수학 문제는 비교적 정답이 확실하지만 과학에 관한 토론이 시작되면 저마다 나름대로의 주장을 펴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곤 한다. 바로 그 옆에선 한 학생이 열띤 분위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쉬는 시간을 쪼개 클라리넷을 불었다.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은 문제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할 뿐 대부분의 토론은 학생들이 주도한다.

화학 시간의 수업 풍경. 한 학생이 선생님에게 물었다.

“수소 결합을 하는 분자들 중에 왜 주기율표상 중간에 위치한 물의 끓는점이 가장 높나요?”

선생님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옆 자리 학생이 대답한다.

“수소 결합 수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여기에도 반론이 만만치 않다. 또 다른 학생의 지적. “그렇게 말하기에는 플로라수소가 끓는점이 더 높은데 수소 결합수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없잖아?”

이렇게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다 보면 어느새 교실은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교실 곳곳서 삼삼오오 ‘지방방송’이 난무한다. 졸다가 걸렸던 한 학생도 벌을 받고 선 채로 토론에 끼어든다.

교실 분위기가 모범생답게 정숙하리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이곳에서는 토론 없이 답을 찾아갈 수는 없단다.

게다가 국어 등 일부 과목을 제외하면 교과서는 대부분 원서다.

수업이 토론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미리 공부를 하지 않거나 충분히 알지 못하면 도저히 대화에 참여할 수가 없다. 아이들은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닌, 진짜 ‘공부’를 해야만 한다.

아무리 영재라고 해도 공부와 시험은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 시험은 서술식. 예를 들면 생물 시험은 ‘엽록체 내에 있는 각각의 세포구조 간에 일어나는 광합성 과정을 서술하라’는 식이다. 승병이는 “한두 번 수업을 못 따라가면 토론에 끼기 어렵고 그러다 보면 흥미를 잃게 된다”며 “수업이 끝나도 특별활동 외에 노는 애들은 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과학 실험에서는 매번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또 한달에 한번씩은 KAIST 등 대학을 찾아가 각자가 정한 연구 활동을 해야 한다. 승병이의 주제는 ‘생체 광자의 특성과 그에 관한 연구’다. ‘유공충의 진화와 발생에 관한 연구’를 잡은 친구도 있다.

20일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이지만 그저 ‘놀’ 수는 없다. 계절학기가 시작되기 때문. F학점을 맞았거나 학점을 올리고 싶은 아이들, 미리 다음 학기 공부를 해야 하는 학생들은 선생님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수강신청을 했다.

○ 우리가 영재라고요?

우문이지만 그래도 한 번 물어봤다.

“스스로 영재라고 생각하니?”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냥 피식하고 웃는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란 대답.

광주 출신인 종문이(16)는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이 학교에 입학했다.

“한 번도 다른 학교 애들과 비교해 본적이 없으니 얼마나 잘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학교에서도 그냥 ‘누구는 공부 잘하는 애’ 정도로만 알 뿐 굳이 영재라는 티를 내거나 대접해주는 친구는 거의 없어요.”

다양한 과학영재학교의 교실 풍경. 위에서부터 영어회화 시간, 쉬는 시간에 기타를 치는 학생, 음악을 들으며 과제를 하는 학생, 현미경으로 본 표본 샘플을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는 학생들. 자율성을 바탕으로 다양함을 존중하는 풍토 속에서 학생들은 각자 지닌 재능을 한껏 발휘하게 된다.부산=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종문이 처럼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들어온 학생이 10여명, 1학년만 마치고 들어온 학생도 3명이나 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찍 들어온 학생들 중에는 수업에서 다소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보통 ‘영재’라고 하면 ‘엄청나게 공부를 잘하는 학생’으로 생각하지만 이 학교에서는 ‘어떤 분야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학생’을 말한다. 모두에게 ‘정말 영재 같다’란 소리를 듣는 한 학생은 수학, 물리 문제를 눈으로만 보고서 풀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 학교 학생의 대다수는 중학교 내신 3% 이내의 우수한 성적이다. 그러나 이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일반적인 우등생처럼 전 과목을 다 잘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일부과목은 보통 수준이거나 그보다 못한 학생들도 적지 않다.

때때로 아이들에게 ‘영재’라는 호칭은 부담스럽다.

지수(17)는 “중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영재 왔냐?’며 놀리는 아이들도 있다”며 “그러나 여기서도 공부 잘하는 애와 못하는 애, 어리버리한 애와 똑똑한 애가 나뉜다”고 말했다.

○ 한번 처지면 회복 힘들어

몇몇 학생들은 때때로 ‘나는 범재가 아닐까’ 고민하기도 한다. 한 학생은 “몇 과목을 빼면 ‘내가 이래도 되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라며 “한 반에서도 상중하로 갈려 겉도는 친구들도 있다”고 말했다.

더욱이 ‘자율’이 존중되다보니 한 번 처질 경우 스스로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스스로 공부해야한다’는 말은 이해하지만 ‘어떻게 힘을 내는지’를 알기에는 아직 어리다.

성적은 대학처럼 A, B, C, F로 나온다. 4.5 만점에 2.0이하를 두 번 받으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한다. 한 차례 2.0이하를 받은 한 학생은 현재 휴학을 한 상태다.

전원 2인 1실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이들. 20여명을 제외하면 모두 부산 이외의 지역 출신이고 이중 절반이 서울, 경기 등 수도권 지역 학생들이다.

영재라고 머리에 뿔 달린 것이 아니니 공부이외에는 다른 아이들과 큰 차이가 없다. 여기서도 서로 별명을 지어주고, 이성이나 외모에 관심이 많고 주말이면 놀러 나간다.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니까 주로 주말에 나가 영화관을 가거나 하죠. 영재는 뭐 수학문제 풀면서 노나요?” 승병이가 이렇게 반문했다.

그러나 보통 학교와 다른 점도 있다고 한 학생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학교에는 ‘얼짱’이 없어요. 아저씨도 봤잖아요. 물 안 좋은 거… 하하하”

여학생은 20여명 정도. 그러다보니 나름대로 ‘커플’도 있다. 평일에는 밖으로 못 나가니까 주로 같이 공부를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냥 붙어 있는 게 데이트라고 할까.

“누가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있느냐”는 평범한 질문을 해봤다. 모두들 딱히 누구라고 꼽기 어렵다는 대답이었다. 학생 수가 적고 특별한 사건이 없어 ‘튈’ 기회가 적기 때문이란다.

○ 그들만의 고민

심각하지는 않지만 ‘진학’이나 다른 ‘과학고’에 입학한 친구들과의 비교가 고민의 많은 몫을 차지한다.

“수업 방식은 우리학교가 훨씬 낫죠. 하지만 진학 ‘길’은 다른 학교가 더 낫지 않나 생각해요” 모두들 떨쳐버리기 힘든 갈등이다.

이 학교는 과학 영재를 키우기 위해 수능 공부를 시키지 않고 내신 등급을 매기지 않는다. 대신 KAIST나 포항공대 입학이 보장된다. 그러나 영재들에게는 별로 특별한 이점이 아니다. 일반 과학고에 다니는 친구들도 대개 자신이 원하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대입이 보장된 대신 교과목을 특정과목에 집중하고 있다. 수학 과학이 전체 수업의 약 70%. 상대적으로 영어 국어 등에 대한 수업은 적은 편이다. 특별활동과 봉사활동도 연간 40시간 이상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학교에서 대입 준비를 하지 않다보니 의대나 다른 대학을 갈 수 없어요. 선택의 폭이 훨씬 좁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진로를 고민 중인 한 학생의 말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주말을 이용해 영어나 국어 과외를 받는 친구들도 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리 미리 준비하자는 생각일 것이다.

얼마 전 한 명이 의대에 진학하겠다며, 두 명은 유학으로 진로를 바꿔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기도 했다.

문정오 교장은 “학부모들은 보통 학교 취지보다는 좋은 대학 진학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 사실”이라며 “조기 졸업과 명문대 진학률을 중시하는 교육풍토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영재학교 성패의 열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무척이나 소박했다. 공부를 하면서 ‘좋아하니까’ 이외의 다른 목적이나 욕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국의 ‘뉴턴’을 꿈꾸는 이들의 순진한 꿈이 세속의 욕망과 기준에 쓰러지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어른들의 가장 큰 몫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교사들이 보는 영재들은…▼

영재 교육을 맡아온 교사들이 지난 1년 동안 지켜 본 학생들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학업. 성적과 적성에서 대략 3등급으로 나뉜다. 중 상위의 학생들은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만 하위 학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흥미를 잃어간다고 교사들은 말했다.

KAIST에서 파견 온 김훈 교수(수학)는 “아직 어린 학생들이라 지식의 전달보다는 개념과 운용, 실생활에 적용되는 수학적 원리 같은 내용에 중점을 두고 가르치고 있다”며 “잘하는 학생들은 이미 KAIST 2학년 수준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단순하게 대학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수업 자체는 대학보다 가르치기가 훨씬 재미있는 편”이라며 “아이들의 사고가 획일화되지 않은데다 지적 호기심도 왕성해 수업 때 매우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아직 진짜 영재인지 판별하기는 어렵다. 그는 “다만 이런 교육과정을 통해 20대 초반에 연구에 투입할 인재를 기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이 학교 문경근 교감은 “영재학교에 입학했다고 해서 모든 학생들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10% 정도는 중간에 진로를 바꿀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정 분야에 우수한 학생이 많다 보니 오히려 흥미가 없는 분야는 더욱 관심이 떨어지는 부작용도 발생한다. 반대로 관심 있는 분야는 완전히 몰입돼 빠져들기도 한다.

문 교감은 “꼭 공부가 아니어도 좋아하는 운동이 있으면 수업 후에 그것에만 몰두하는 학생들도 꽤 있긴 하다. 하지만 대체로 인문, 예체능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 이를 보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수학, 과학에 뛰어난 학생들이다 보니 점점 더 논리적으로 변하는 것도 특징 중의 하나.

문정오 교장은 “한번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태권도에 대해 한 학생이 ‘왜 교장선생님은 전체 학생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일괄적으로 시키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때문에 교사들은 나름대로의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느라 혼이 나기도 한다.

야단을 칠 때도 왜 야단을 맞아야 하는지 설명을 해줘야 납득을 한다는 영재를 온전하게 길러내기 위해 이 학교는 인성교육도 병행할 계획이다.

부산=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선발과정-특징은…▼

과학영재학교는 매년 9월 3단계의 전형과정을 거쳐 144명의 신입생을 선발한다. 중학생이면 학년에 관계없이 지원할 수 있다.

1단계는 서류전형. 수학, 과학 분야의 내신과 각종 경시대회 수상 경력, 과학 분야에서 활동한 내용, 자기소개서, 추천서 등을 종합해 평가한다. 전체적인 실력은 다소 부족해도 한 두 분야가 뛰어나면 일단은 통과된다. 평균적으로 입학생들은 내신 3% 수준.

2단계는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 테스트. 정답이 없는 문제들을 주고 아이디어와 접근 방법, 결과를 서술하는 능력 등을 살핀다. 수학과 과학 분야 4과목에서 4문제씩 주어진다.

3단계는 3박4일간의 과학 캠프. 올해는 실험이 포함됐다. 주어진 문제를 실험하고, 풀고, 정리하고, 발표하는 것까지 전 과정이 평가대상이다. 여기에 심층면접이 곁들여진다.

입학하면 일반 고교 3년 과정은 1학년 때 끝내고, 2학년부터는 좋아하는 과목을 선택한다. KAIST 등에 입학이 보장되기 때문에 수능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내신도 없다.

교과(145학점), 연구 활동(30학점)을 이수하면 졸업을 하게 되는데 최소한 2년반이 걸린다. 또 특별활동과 봉사활동을 각각 연간 40시간 이상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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