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황호택/盧대통령의 학습능력

  • 입력 2003년 7월 15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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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29 선언’ 이후 독재정권 하에서 숨을 죽였던 노동운동이 성난 불길처럼 번져갔다. 그 무렵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에서 근로자 한 명이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 ‘사태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필자는 그해 여름 거제에서 두 변호사를 만났던 일을 1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상수 변호사(현 민주당 사무총장)와는 시국사건 법정에서 더러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지만 지방에서 활동하던 노무현 변호사는 초면이었다.

사망한 근로자의 빈소에서 작업복 차림의 노 변호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자 그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기자를 만나 수줍음을 타는 듯한 노 변호사의 모습에서 나중에 정치인이 돼 보여준 ‘공격성’과 ‘용맹성’을 눈치 챌 수는 없었다.

노 대통령이 집권한 지 5개월이 돼 간다. 친노(親勞) 정책에 편승한 노사 분규의 확대, 전교조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파동, 대통령직에 어울리지 않는 언어의 사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새 정부의 지지도가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같은 시기에 비해서도 지지도가 떨어진다.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더욱 확신을 갖게 된 눈치이고,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이모저모 걱정이 늘고 있다.

노 대통령의 지지도를 떨어뜨린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해 여름의 일을 기억하는 필자는 노 대통령의 직무 수행 방식이 노사분규 현장에서 열변을 토하던 운동권 변호사에서 탈각(脫殼)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말이 갖는 무게에 대한 신중한 고려 없이 원고 없는 특강을 좋아하는 것도 근로자 앞에서 마이크를 잡던 노 변호사 스타일이다. 특강 내용도 잘 준비되고 정제된 표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민노총과 전교조를 다루는 노 대통령의 방식에도 노동운동의 옛 동지를 대하는 변호사 의식이 은연중 투영돼 있다. 개혁과 반개혁으로 나누는 것도 독재 반독재의 이분법 구도에서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을 하던 의식이 여전히 그의 사고를 지배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대명천지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이 선거기간의 논조에 따라 편을 가르고 특정 신문을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집권 초기의 숱한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아직 기대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노 대통령이 지난 시절에 보여준 범상치 않은 학습능력과 변화의 가능성 때문이다. 사법고시가 사람의 능력을 재는 유일한 잣대는 아니지만 상고 졸업자가 사법시험 17회(58명)에 합격한 것은 대단한 학습능력이다. 노 대통령 스스로 “1000명을 뽑는 시험과는 달랐다”고 자부심을 섞어 말했던 적이 있다. 초선 의원으로 5공 청문회에서 일약 스타가 된 것도 탁월한 학습능력과 법정에서 다져진 변론술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노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5개월 동안 많은 충격과 변화의 동인(動因)을 체험했다. 그 연령에 생애 처음 미국에 가봤다. 노동자들만 만나다가 재계 총수들을 불러 모아 기업을 꾸려가는 고충을 듣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이제 직무 수행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던 변호사의 스타일을 버리고 대통령이 되어 체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뛰어난 학습능력을 보여줄 때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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