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임규진/韓銀총재가 '말' 쏟으면…

  • 입력 2003년 7월 10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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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낮 12시 한국은행 기자실. 박승(朴昇) 한은 총재는 “4% 성장을 달성했으면 하는 게 한은의 소망이지만 현재의 경제 여건을 볼 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다”며 “성장률이 4%에 못 미칠 때 발생하는 일부 실업은 참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박 총재는 5월 “성장률 4%가 안 되면 고용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추가로 금리를 내려서라도 4%에 맞춰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었다. 불과 2개월 만에 실업문제에 대한 중앙은행 총재의 생각이 완전히 바뀐 셈이다.

중앙은행은 모든 금융기관의 ‘최후의 보루(堡壘)’로 통한다.

따라서 각국의 중앙은행은 보수적이며 각종 현안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접근한다. 중앙은행(총재)의 섣부른 한마디가 금융시장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박 총재의 언행은 중앙은행(총재)이 가져야 하는 신중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행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인 경제전망만 해도 자주 바뀌다 보니 시장의 신뢰를 잃고 있다. 바뀐 전망에 맞춘 금리정책 역시 정책효과가 떨어지고 있음은 누구보다 그가 잘 알 것이다.

박 총재는 1월 3일 신년기자간담회에서 “올해 성장은 수출과 설비투자가 주도할 것”이라며 “투자가 활발해지면 물가가 불안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4월 17일에도 “경제가 어렵지만 경기부양책을 쓸 때가 아니며 인위적 경기부양에는 부작용이 따른다”며 “내년에 세계경제가 나아지므로 구조조정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우리 경제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시장에 최소한 상반기 중 콜금리를 동결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러다가 4월 말 갑자기 “한국경제가 어려워졌다”고 설명하면서 5월엔 ‘군사작전’하듯 콜금리를 전격 인하했다.

그 뒤 박 총재는 6월 17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에서 “한은이 콜금리를 인하했고 정부도 4조원의 추경예산을 편성한 만큼 올해 4% 성장은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더 이상의 콜금리 인하가 없을 것이란 얘기로 해석됐다. 결국 그의 장담은 한 달을 못 갔고 콜금리는 인하됐다.

문제는 박 총재의 잦은 말 바꾸기로 중앙은행의 신뢰가 떨어지면서 통화정책의 효과도 반감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운찬(鄭雲燦) 서울대 총장은 최근 사석에서 기자에게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지도자는 원고 외에 준비되지 않은 말을 해선 안 된다”며 언행의 신중함을 강조한 바 있다. 박 총재야말로 정 총장의 이 말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임규진 경제부기자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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