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인류학자의…' 좌익마을로 본 대안적 역사쓰기

  • 입력 2003년 7월 4일 17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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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의 과거 여행/윤택림 지음/327쪽 1만5000원 역사비평사

1989년 한 여성 인류학자가 충남 예산의 어느 마을을 찾았다. 6·25전쟁 때 ‘예산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시양리(가명)에서 9개월을 보낸 이 학자는 주민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어떤 공식 역사나 기록에도 드러나지 않던 마을사를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 정리해 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었던 6·25전쟁의 비극적 면모들이 마을단위에서, 가족의 입장에서, 그리고 여성의 입장에서 펼쳐졌다.

역사인류학자인 저자는 격랑에서 살아남은 마을사람들의 기억을 ‘구술·생애사’라는 형식을 통해 솜씨 있게 문자로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시양리에서의 6·25전쟁은 계급문제가 갈등의 주요변수가 아니었다. “이데올로기는 마을사람들간의 개인적 싸움, 가족간의 불화, 정치적 경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수사적, 상징적 장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라는 거대 괴물이 국가차원에서 작동한다고 ‘상상’했지만 지방정치의 토대인 군(郡)차원으로, 그리고 마을 차원으로 내려갈수록 그 실체는 점차 미궁에 빠진다.

시양리 좌익지도자로 예산군 인민위원장을 지낸 유찬길의 가족사는 전쟁의 악마성과 광기를 보여준다. 항일운동가 출신이었던 유찬길은 수복 직후 사살됐고, 두 아들은 부역 혐의로 사형당하거나 행방불명됐다. 딸은 경찰에 유린당한 후 자살했다. 전후에도 불행의 그림자는 그의 가족들을 휘감았다. 그의 형은 월북 후 남파됐고 아들과 조카딸 역시 월북했다.

여성사의 입장에서 볼 때 좌익지도자 3인의 아내들은 전쟁을 통해 “극단적인 가족의 해체와 재형성을 경험”했으나 6·25전쟁과 남편에 대해선 침묵을 지켰다. “남편들이 선택한 이데올로기는 남편들이 죽거나 행방불명된 전후의 험난한 삶을 이들에게 던져놓았다”는 지적은 여성의 입장에서 본 전쟁의 진상이었다.

총 3부, 10장으로 구성된 윤택림의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흥미로운 요소들로 무장하고 있다. 1부는 민중사를 비판하며 ‘대안적 역사쓰기’에 관한 이론적 논의를, 2부는 시양리 현지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마을사 가족사 여성사를, 3부는 자기성찰적 후기를 다루고 있다. 각 장은 유기적이면서도 독립된 형태를 띠고 있다. 저자의 도구는 ‘대항담론으로서의 구술사’, ‘대항서술로서의 생애사’, 구술에 의한 ‘마을사’, ‘가족사’, ‘여성생애사’ 등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주민들의 구술증언을 통해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살린 것이다. 인류학과 역사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역사학자들에게 끊임없이 말 걸기를 시도한 점 역시 돋보인다. 그런데 이 책은 명백한 인과관계나 사건 인물의 사실적 복원을 목적한 것은 아니며, 재구성된 마을사 가족사 여성사는 살아남은 사람들 기억의 재현이다. 따라서 구성된 마을사가 진정으로 그 마을의 진실 혹은 인과관계를 반영하는 ‘역사’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쉬운 것은 이 책이 1992년도 박사학위논문이었으나 10년 뒤에 출간된 점이다. 따라서 논쟁적인 주제를 다룬 1부는 19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의 논의들을 주요 의제로 삼은 탓에 현실감과 긴장감이 떨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 활발한 글쓰기를 해온 저자는 한국역사학계의 ‘위기’를 지적하며 민족주의 민중사 등 거대담론의 해체를 주장해왔다. 그가 대안적 역사 또는 탈식민지 역사의 모델로 제시한 ‘다양성과 다중성을 드러내는 구술사를 통한 지방사’는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역사학계의 동의를 얻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새로운 방법론이 아닌 ‘대안’으로 성립하기 위해선 내용적 증명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병준 목포대 교수·한국현대사 bjjung@mokp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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