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편지]진준근/정든 동네를 떠나며

  • 입력 1998년 4월 8일 19시 47분


지난 2월부터 대연동과 용호동 등 남구 일대의 전셋집을 구하기 위해 내자(內子)와 함께 저녁 늦게까지 탈진이 될 정도로 전신주를 쳐다보며 뒷골목을 돌아다녔다.

구청의 도시계획공사 구간에 편입된 가옥에 대한 보상금이 나왔는지 확인하려고 은행통장을 정리기에 넣고 찍어 보았다. 보상통지서류에 적혀있는 금액이 정확히 입금되어 있었다. 이제는 떠나야겠구나.

퇴근시간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케케묵은 등기부등본을 펼쳐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6·25전쟁때 부모님이 피란와 22년간 현재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살다가 부산시의 도시계획사업으로 철거돼 현재의 집으로 이주했는데 또다시 26년만에 공익을 위해 동네를 떠나게 됐으니 얼마나 ‘악연’인가.

다섯 식구가 살 수 있는 공간을 구하기엔 보상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토지를 팔면 되겠지만 지적측량이 오락가락하는 통에 아직 시빗거리가 남아 상당기간 매매가 곤란해서 결국 은행에 대부신청을 해 놓은 상태다.

과거 도시계획 업무를 직접 맡아 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당시 빨리 가옥을 철거해 주지 않았던 주민들을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무슨 ‘불순세력’이라도 되는 듯 보았는데 이제서야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니 아이러니다. 그리고 사업계획서를 작성할 때 높은 분들의 눈이 많이 미치는 지역에 대해 ‘사업효과 큼’으로 기재했던 일도 부끄러운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행정의 사각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민초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평소 꾸준히 탐색하는 정치가와 행정가는 누구일까. 역대 국회의원 선거를 비롯한 각종 선거에서 이곳에 소방도로 개설을 공약하지 않은 입후보자가 없었지만 선거 이후 주민들은 한결같이 좌절을 맛보았다.

진준근(부산시 남구 우암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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