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급간부 「헤드헌팅」시장 지원바람

  • 입력 1998년 4월 5일 19시 26분


H그룹 전자연구소의 프로그래머 J씨(31). 2일 아침 “프로젝트 협의차 S대에 좀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그러나 대학이 있는 쪽과는 반대방향으로 핸들을 꺾었다. 1시간 뒤 J씨가 도착한 곳은 강남에 있는 한 헤드헌팅업체 사무실. “저 며칠 전에 전화한 사람인데요, 이력서를 좀….”

입사 5년차의 젊은 대리. 지난해말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회사를 나간 동료연구원이 헤드헌팅업체를 통해 외국계 기업에 재취업했더군요. 늘 불안해하며 살 게 아니라 지금부터 살길을 도모해야겠다는 생각에서 헤드헌팅업체에 이력서를 내놓았지요.”

J씨는 요즘 헤드헌팅업체를 찾는 무수한 ‘개미군단’중 한 사람이다. 평생직장은 없고 평생고용만 남은 시대. 현직에 있지만 고용시장에 자신을 내놓아 언제라도 기회가 오면 자리를 옮기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한파 이후 직장을 구해달라고 이력서를 제출하는 사람이 일주일에 1백50명 수준에서 4백∼5백명으로 3배쯤 늘었습니다. 직급도 예전에는 부장급 이상의 간부가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은 대리 과장급의 지원자가 쏟아져요.”

헤드헌팅업체 유니코서치 김형진사장의 설명.

헤드헌팅(Headhunting). 기업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최고경영자나 임원직 고급기술인력 등 ‘인재’를 발굴해주는 업종. 그러나 이 업종의 국내시장기류가 크게 바뀌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경제난으로 수요는 줄어든 가운데 공급(지원자)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 금융 건설업계를 선두로 전 분야에서 지원자가 쇄도한다.

동종업계 이직을 일정기간 금지하는 이른바 ‘노비문서’가 존재하는 증권업계. 과거에는 헤드헌터라고 신분을 밝히고 전화조차 하기 힘들었지만 금융권 붕괴 이후 “한 증권업체 인사부장으로부터 정리해고 대상자의 신상기록을 담은 소포꾸러미와 ‘잘 부탁한다’는 메모를받았다”는헤드헌터가등장할정도다.

줄어든 수요 가운데도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다. 첫째는 기업간 합병으로 인한 ‘새로운 타입’의 인력요구.

“외국기업과 합병되는 국내기업의 계약과정에 참여해 필요한 인력의 숫자와 질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외국기업과 합병되면 영어든 일어든 최소한 합병주체기업의 모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아는 인력이 필요하게 돼요. 앞으로 기업합병이 본격화되면 거대한 시장이 창출될 겁니다.”

KK컨설팅 김국길사장의 전망.

안으로는 ‘구조조정’으로 인력을 줄이는 대기업들이 비밀리에 헤드헌팅업체에 “사람 좀 찾아달라”고 주문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기존의 4개부서에서 하던 일을 2개부서로 줄였는데 통합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를 찾아달라는 주문이 대부분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기업들이 기존 인력 중에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휴먼서치 한재욱실장의 설명이다. 헤드헌터들은 국내 대기업들의 이런 동향이 ‘고용문화 변화’의 시발점이라고 판단한다. 계속되는 한실장의 설명.

“몸집줄이기를 해본 기업들은 대부분 공개채용으로는 원하는 인력을 뽑는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신입사원을 뽑아 기업이 원하는 인력으로 키우는데 들이는 비용보다 원하는 인력을 헤드헌터들에게 구체적으로 주문해 곧바로 현장에 투입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계산이지요.”

지원자의 능력과 성향에 대한 파악보다는 인상 관상 등 ‘감’이나 인맥 학맥 등 사적 네트워크에 의존해 필요인력을 뽑아온 국내기업들. ‘거품빼기’를 거치며 맞지 않는 ‘궁합’으로 어영부영 함께 살아온 직원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일부 헤드헌터들은 이 때문에 공채와 헤드헌터를 통한 인력충원이 공존하는 고용문화가 빠른 속도로 정착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한 헤드헌터의 얘기. “적절한 인력을 소개하고 연봉의 20∼30%를 수수료로 받는 헤드헌팅업체는 사람을 잘못 소개하면 돈을 물어내야 해요. 명백한 ‘거래’이기 때문에 능력에 따른 공정한 인사를 할 수 있습니다.”

고용문화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취업희망자들의 ‘태도변화’를 요구한다. 지방대학출신으로 외국인투자기업에서 출발한지 5년만에 헤드헌터를 거쳐 다국적 여행전문기업의 회계담당으로 전직한 윤모차장(33). “고용시장에 스스로를 내놓을 생각이라면 입사초기부터 자신만의 ‘히든카드’를 갖도록 경력을 관리해야지요. 그래야 막다른 골목에 몰려 새 직장을 찾는 일이 없고 ‘기득권’이 있을 때 내 몸값을 여유롭게 흥정할 수 있거든요.”

◆ 헤드헌터 100% 활용법 ◆

헤드헌터들에게 무작정 이력서를 내밀고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지원자는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 헤드헌터들이 말하는 ‘헤드헌터 100% 활용법’.

▼이력서를 끊임없이 경신하라〓‘영어회화능력 향상’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램 마스터’…. 당신의 능력이 계속 향상되고 있다는 것을 헤드헌터들에게 알려주라. 자주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먼저 문이 열린다.

▼이력서는 ‘쩨쩨하다 싶을 만큼’ 구체적으로 써라〓‘00년 입사, 00년 진급, 00년 퇴사….’ 20년 근무경력에도 이력서를 채 두장도 못 채우는 사람이 대부분. 스스로 고용시장에 나선다는 것은 능력을 홍보하고 파는 것. 어떤 일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라.

▼가고 싶은 회사를 ‘지정곡’으로 정하라〓기업체가 나를 찾아주기만을 기다리면 안된다. ‘이런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의사를 분명히 밝히면 헤드헌터들은 그 회사로부터 의뢰받을 때 당신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기업을 지정하면 의외의 성과도 거둘 수 있다. 인력 의뢰 기업의 내부사정부터 먼저 실사하는 헤드헌터들은 ‘당신이 원하는 기업이 밖에서 당신이 보던 것과는 다르다’는 등의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력서는 최고급으로 작성하라〓전화로 문의한 뒤 팩스로 이력서를 보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런 이력서는 데이터베이스 밑바닥에 깔리기 십상. 고급지질의 종이에 찍은 밝은 인상의 ‘고급스런 사진’을 첨부한다.

▼헤드헌터는 ‘나를 평가하는 자’라고 생각하라〓‘한번 입사는 영원한 직장’ 시절에는 자신을 끊임없이 객관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젠 최소한 3∼5년 단위로 자신의 능력을 재평가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한다. 직업인으로서 약점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주는 컨설턴트로 헤드헌터를 활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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