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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 장터에 日軍 포진… 목숨건 농민들 마을단위로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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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 장터에 日軍 포진… 목숨건 농민들 마을단위로 봉기

원주=김지영 기자 입력 2019-06-08 03:00수정 2019-06-0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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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59화> 강원 원주
강원 원주시 소초면에서는 1919년 4월 5일 원주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정기 가다듬어 자주독립 외쳐보세”라는 의병 출신 박영하의 격려문에 힘입어 3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100년 만인 올해 4월 5일 소초면에서 열린 3·1운동 기념행사에서 참석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원주시 제공
강원 원주시 봉산로 원주시역사박물관 중앙전시홀에선 ‘3·1운동과 원주’ 특별전시가 한창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원주 곳곳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의 함성을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기록물을 선보이는 전시회는 이달 30일까지 계속된다. 박물관은 면리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만세운동을 상세하게 수록하고 유공자들의 판결문과 사진 자료 등을 담은 학술도록도 발간했다.

“원주는 서울에 인접한 강원도의 주요 거점 지역이었기에 1919년 3·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원주의 동태는 일제의 집중적인 감시와 견제를 받게 됐다”고 김성찬 학예연구사는 설명한다. 여기에다 일제가 경계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고종의 서거 소식을 들은 원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조의를 밝히고자 삼베 천으로 만든 상장(喪章)을 달고 다니다가 제지를 당했다. 이어 4학년 김정열 학생이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하다가 하시구치 류타로 교장에게 발각됐다. 3월 16일 춘천 79연대 소속 보병 20명이 원주에 증파된 것은 이러한 움직임 때문이었다. 이는 원주의 만세 시위 거사가 쉽지 않았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 노림의숙 졸업생들이 외친 독립만세의 함성



원주시 부론면 노림리는 문막읍과 흥호리를 동서로 10리 정도에 두고 중간에 위치한 곳이다. 일제 초기까지 노림리에 부론면사무소가 있었지만 3·1운동 당시의 면사무소 소재지는 흥호리였다. 1930년대에는 현재의 법천리로 면사무소가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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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림리에 있는 노림초등학교 건물은 옛 노림의숙 자리다. 노림초등학교는 인구가 줄면서 2004년 부론초등학교에 통합됐다. 노림리에 노림의숙이 세워진 것은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5년이다. 평야가 발달하고 물산이 풍부했던 문막읍에 일찍이 보통학교가 건립돼 있었음에도 멀지 않은 곳인 노림리에 사립학교를 추가로 세운 것은 일제에 항거해 민족교육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노림의숙에서 채용한 교사는 항일사상가였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3·1운동사’)

노림의숙 교사 홍남표와 어수갑은 1919년 3월 3일 고종 인산에 참례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왔다. 두 선생은 노림의숙의 제1회 졸업식이 열리던 3월 22일 졸업생 40여 명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었다. 신교육의 세례를 받은 학생들의 가슴에 곧장 불이 댕겨졌음은 짐작할 만하다. 원주 최초의 만세운동이 벌어진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졸업식이 열리고 닷새 뒤인 3월 27일 오후 원주 군수 오유영이 부론면사무소가 있는 흥호리에 출장을 나와 시국 강연회를 개최한다. 일제가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 말단 관리를 동원해 주민들을 회유하고자 한 방책이었다. 이 강연을 듣던 노림의숙 졸업생들은 그 자리에서 항거하려다가 부론면 면서기 유필준에게 저지당한다.

노림의숙 졸업생들이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벌인 것은 면사무소에서 쫓겨나면서부터다. 졸업생들은 곧바로 노림리로 돌아온다. 한범우 한돈우 정현기 김성수 등 졸업생들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만든 뒤 길목에서 기다렸다. 당나귀를 탄 군수가 보이자 졸업생들은 목청껏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철원에서 군수가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는 소식을 밝히면서 “당신은 어찌하여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자”라고 원주군수에게 외친다.(오영교·왕현종, ‘원주독립운동사’)

졸업생들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놓고 군수와 논쟁을 벌였고, 급히 문막읍으로 돌아온 군수는 헌병을 출동하도록 했다. 졸업생들 대부분이 피신했지만 시위를 주도한 한범우는 체포돼 징역 10개월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 “겨레 위해 굴하지 않을 때는 죽음도 가볍다”


3·1운동 당시 원주군 원주읍에는 헌병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헌병파견소가 신림면 문막읍 호저면에, 헌병출장소가 부론면에 각각 설치돼 있었다. 원주지역에 설치된 경찰기관은 5개, 헌병 인력은 65명 정도였다. 그만큼 경비가 삼엄했다는 얘기다. 원주의 중심지인 원주 읍내에서 시위가 일어나지 못했던 이유였다.

하지만 일제가 세운 헌병경찰제로 인해 원주 3·1운동은 다른 곳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게 됐다. 원주는 구한말 치열한 의병투쟁이 전개됐던 곳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뿌리 깊은 지역이었다. 지방으로 확산된 만세 시위에 대한 열기가 원주지역에도 달아오르지 않을 리 없었다. 1919년 3월 30일 조선총독부 내무부에는 “원주읍내 시장은 본일 개시일인데 3000, 4000명의 집합을 예상하며 형세 불온하므로 경계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만세운동이 폭발 직전이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지역에선 읍내의 장날을 계기로 만세운동이 벌어졌지만 원주는 일제의 경계로 인해 읍내에서의 시위가 실행되지 못했다. 그 대신 읍내 주변의 면리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마을 단위의 봉기가 이어졌다.

소초면행정복지센터에 건립된 소초면독립만세기념비. 원주=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그중 소초면은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꼽힌다. 이곳의 시위는 강원 횡성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소초면은 지리적으로 횡성과 가까웠고 왕래도 잦았기에 3월 27일과 4월 1일 횡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소초면 주민들은 장을 보러 갔다가 자연스럽게 시위에 참여하게 됐다. 이들 중 일본 수비대의 발포로 소초면 둔둔리 주민인 강달회와 하영현이 사망하면서 소초면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4월 3일 두 사람의 장례식 때 둔둔리의 서당 훈도로 있던 의병 출신 박영하가 평장리 주민 신현철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담은 서신을 보냈고 면내에 격문을 뿌렸다. “각자가 분발하고 마음과 뜻을 다하여 나라를 내 몸 사랑하듯 하라. 노예로 사는 것이 죽음보다 좋을쏘냐?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면 죽음 속에서도 삶의 길을 찾느니라”라는 내용이었다.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격려문도 곳곳에 붙였다. “나라 위해 소중히 쓰일 때는 내 목숨 또한 크고, 겨레 위해 굴하지 않을 때는 죽음 또한 가볍도다. 원수의 노예 되어 한 하늘을 일 것인가. 유사무생하게 된 기막힌 운명 민족정기 가다듬어 자주독립 외쳐 보세.”(황주익, ‘내 고장 내 겨레’)

박영하의 편지를 받은 신현철은 지인들을 동원해 인근에 위치한 의관리와 장양리, 평장리 교항리에 만세 시위 계획을 알렸다. 소초면 마을 중 수암리는 제외됐다. 소초면 관할 헌병주재소가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4월 5일 군중이 면사무소로 향하는 부채고개에 모였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선 “교항리 주민들은 때마침 마을에 장례식이 있어 오후에 도착했고 술도 약간 취하였다”고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자리에 모인 300여 명의 군중은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로 갔고 면장을 끌어내 만세를 부르게 했다. “과격한 농민은 면장에게 덤벼들어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됐으나 박영하의 선창으로 만세 소리가 폭발하니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에 마음을 모았다.”(‘한국독립운동사’)

이날 시위 참가자들은 오후 5시에 해산했지만 뒤늦게 소식을 들은 수암리 헌병주재소에서 각 마을을 다니면서 만세 가담자들을 찾기 시작했고, 박영하와 신현철을 비롯한 17명이 체포됐다. 2006년 소초면행정복지센터에 세워진 독립만세기념비는 이날의 만세운동을 기린 것이다.

그해 4월 소초면의 시위를 비롯해 건등면(현재 문막읍) 지정면 부론면 귀래면 호저면의 각 리에서 만세 시위나 봉화 시위가 전개됐다. 농민들의 자발적인 독립운동이었다. 마을 단위의 봉기는 원주지역 만세운동의 특징이기도 했다. 오영교 연세대 교수는 “중앙으로부터의 연계나 조직의 도움 없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모습은 독립에 대한 일반 민중의 간절한 염원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 원주 출신 장용하 “독립위해 일어나라”… 서울서 격문 인쇄해 배포 ▼


배재고보 하숙집서 비밀출판 운동, 체포돼 징역 3년형 선고 받아


원주의 3·1운동사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은 장용하(1900∼1978·사진)다.

원주군 하동리(현재 원주시 학성동) 출신인 장용하가 3·1운동 때 전개한 독립운동은 비밀출판이었다. 서울에서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하던 장용하는 3월 7일 ‘조선은 독립할 수 있으니 모두 분기하라’는 내용의 격문 20여 장을 탄산지에 등사해 시내에 뿌렸고, 3월 15일에는 ‘조선 민족은 자신(自信)을 먼저 세워라’라는 제목의 문서 20여 장을 등사해 배포했다.

이어 ‘조선독립신문 제16호’(3월 28일) ‘반도의 목탁 제1호’(4월 1일) ‘반도의 목탁 제2호’(4월 12일) ‘8면에서 관찰한 조선의 참상’(4월 13일) ‘반도의 목탁 제3호’(4월 22일) ‘반도의 목탁 특별호’(4월 25일) 등의 유인물을 인쇄하고 서울의 가정에 배포해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1974년 동아일보가 각계 원로들의 회고를 연재한 ‘편편야화’에서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김기진은 3·1운동 때 배재고보 동급생이었던 장용하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이를 통해 당시 비밀출판 운동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장용하 반장의 지시대로 3월 1일에 탑골공원에 가서 모든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는 그날 밤부터 재동에 있는 장용하 반장의 하숙집으로 가서 다른 동지들과 함께 ‘독립신문’을 만들고 그 방에서 동지들과 함께 새우잠을 자고는 식전에 일어나는 길로 독립신문을 한 뭉치 품속에 감추어가지고 우리집으로 오면서 집집마다 대문 안으로 독립신문을 집어넣었다.”(동아일보 1974년 5월 23일자) 일본 경찰에 체포된 장용하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배재학교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 활동에 헌신했다.

원주=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3·1운동 100년#강원 원주#노림의숙#장용하#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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