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식의 뫔길]어른 없는 대한민국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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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열린 부처님오신날 기념 음악회에 참석한 법정 스님(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김수환 추기경(오른쪽). 동아일보DB
2005년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 열린 부처님오신날 기념 음악회에 참석한 법정 스님(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김수환 추기경(오른쪽). 동아일보DB

김갑식 문화부 전문기자
김갑식 문화부 전문기자
2월은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의 달, 3월은 법정 스님(1932∼2010)의 달, 4월은 부활절, 5월은 부처님오신날….

공휴일을 포함해 특별한 의미를 담은 날짜들이 빼곡하게 표시된 달력이 있지만 종교 담당 기자의 달력은 좀 다릅니다. 특히 2, 3월은 나름 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을 기리는 시기로 정해 두고 있어 두 분과 관련한 스토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세월이 무상하니 점차 잊혀진다는 게 세상의 순리이기는 합니다. 그 아쉬움 때문에 두 분을 재조명하는 면도 있지만 그분들 삶의 향기에 다가서는 다른 어른을 찾지 못하는 까닭이 더 큽니다.

최근 광주 무각사에서 만난 청학 스님도 비슷한 얘기를 하더군요. 스님은 법정 스님이 유럽 여행 중 거리에서 빵을 먹거나 기차를 기다리는 일상을 담은 사진을 건네면서 “요즘이야말로 무소유의 향기와 정신이 필요한 게 아니냐”고 했습니다.

청학 스님을 비롯해 법정 스님 곁을 지켰던 이들에 따르면 스님의 물질 또는 세속적 이익에 대한 거부감은 ‘결벽증’에 가까웠습니다. 남에게 부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세지는 것도 몹시 싫어해 남들의 눈에는 까칠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하네요. 스님은 담박한 글로 필명을 얻었지만 ‘글빚’이라며 책조차 남기지 말라고 유언했습니다.

아쉽게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법정 스님의 입적과 장례 현장을 지키지 못했지만 김 추기경 선종 당시의 기억은 생생합니다. 명동대성당 주변을 몇 바퀴나 감싸던 끊임없는 조문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스타의 공연장에서나 볼 법한 일이었죠.

김 추기경은 1989년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한 뒤 장기 기증을 통한 생명 존중과 나눔 실천을 위해 한마음한몸운동본부를 설립했습니다. 추기경 선종 몇 해 뒤에 만난 이 단체의 본부장 정성환 신부(현 천주교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총무)의 말입니다. “김 추기경이 남기신 것은 한마디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대로 바라봐 주는 인간애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강력한 리더십이 아니라 품어주고 안아주고 말을 들어주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 섬김의 리더십이죠. 그런 지도자, 큰 어른이 없으니 추기경이 더 그리워집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당시 특정 종교를 뛰어넘는 ‘파파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언제나 상대방에게 맞춰 눈을 맞추고 소외된 이들을 먼저 찾는 교황의 낮은 행보는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준 바 있습니다. 그 감동과 별개로 내심 뼈아프게 느낀 것은 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 이후로 더욱 커진 어른의 빈자리였습니다. 종교계는 물론이고 각계 원로를 헤아려 봐도 우리 시대의 어른을 찾기는 어려웠습니다.

다시 4년 뒤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맞아, 바로 이분”이라는 인물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특정 집단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분들은 있지만 이념과 세대, 지역을 뛰어넘는 시대의 어른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 관용이란 단어가 사라진 것도 어른 부재의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관용의 ‘관’ 자만 꺼내도 이른바 적폐세력이 될 분위기입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이 아니라면 세상에서 공존할 수 없다는 흑백 논리, 이념에 따른 진영 논리가 여론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살아 계셔도 이 놀라운 여론의 급류에 혀를 내둘렀을지 모를 일입니다.

2016년 국내 출간된 일본의 유명 저자 우치다 다쓰루의 ‘어른 없는 사회’는 우리 현실에도 시사점이 있는 제목 때문에 손이 갔던 책입니다. 실제 일본 사회가 산업화와 가족 해체, 청년과 노인 문제 등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앞서 경험했기에 꽤 그럴듯한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책의 주제는 ‘성장의 대가로 전통적 공동체의 미덕을 희생시킨 사회는 성장 신화가 붕괴한 시대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라는 겁니다. 결국 ‘어른의 부활’이 절실하다는 게 결론입니다. 그가 말하는 어른은 사회를 보전하는 일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버린 것이 아니라도 발아래 유리조각을 먼저 줍는 사람입니다. 내가 버린 것이 아니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이라는 거죠.

4월 1일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는 세상 모든 가치에 앞서는 가치로 사랑을 실천했고, 부처는 깨달음을 통해 번뇌를 벗었음에도 마지막 중생까지 책임지기 위해 사바세계에 머물렀습니다. 부활의 시기에 어른이 부활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그려봅니다.
 
김갑식 문화부 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김수환 추기경#법정 스님#부활절#청학스님#한마음한몸운동본부#서번트 리더십#프란치스코 교황#파파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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