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돌손바닥에 놀고 가는 선녀구름같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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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돌손바닥에 놀고 가는 선녀구름같이 ―강인한(1944∼ )

이만치 서서 바라보면 잘 보이려나
청보리 물결 황토를 휘돌아 흐르는 연두바람
불어라 불어가라
적막을 조그맣게 뭉쳐 입 다문 돌탑에까지
말갛게 몸 비우고 스미는 연두바람

왕궁에 가시랴오
예서 왕궁이라면 낙낙한 오릿길
잠시 버선을 벗어 땀들이시라

늘어진 솔가지에 이녁 눈길 얹어보시라
어디선지 흘러오는 수수꽃다리 글썽한 향기
이녁의 옷고름에서 풀려나온 그 말간 향기는
돌손바닥에 앉고 싶어
돌에 스미고 싶어
왕궁탑 그늘에 한 몸의 시름을 적시고
바라느니 하늘에 떠가는 저 구름 가
이녁은 보랏빛 내 그리움
보랏빛 향기로운 그늘

사붓사붓 돌손바닥에 놀고 가는 선녀구름같이
아, 적시고 적시어라 뜻으로 세워지는
고운 봄날에.


아득히 그려보느니, 백제 왕궁의 그 웅자, 먼 옛날 어른들의 말씀으로만 전해오던 빈터에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 온몸으로 그날의 위엄을 증언하고 있다.

배롱나무 숲 위에 늠름한 어깨를 펴고 선 저 사내, 백제탑이니 신라탑이니 엇갈리는 평가로 땅 이름을 따서 ‘왕궁리탑’으로 불리며 처음엔 보물 제44호로 등급을 받았었다. 1965년 해체 복원하면서 금제사리탑, 사리병 등과 금판금강경, 청동여래상 등이 발굴되면서 백제시대 유적에 세워진 것으로 보게 되었고 1997년에 국보 제289호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왕궁마을 뒷산을 이곳 사람들은 ‘모질메’라고 부르는데 읍지 ‘금마지(金馬誌)’에는 마한 때의 ‘조궁(朝宮)’ 터가 남아있다고 써 있다. 실제로 발굴 조사로 남북 460m, 동서 230m의 ‘왕궁평성’ 터가 확인되었으며 백제기와 가마터와 관궁사(官宮寺)라는 명문의 기와가 발견되어 궁궐을 받치는 절터임도 밝혀졌다. 따라서 백제의 금마도읍설을 두고도 학계의 논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시인은 청보리 바람에 일렁이는 봄날 고향 가까운 왕궁리 석탑을 선녀구름이라 여기어 ‘잠시 버선을 벗어 땀들이시라’며 지나가는 길손의 소매를 잡아끈다.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
#돌손바닥에 놀고 가는 선녀구름같이#강인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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