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한 시대를 같이 산 사람들을 위하여

  • 입력 2009년 5월 28일 02시 59분


지난해 폴란드의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가 8번 교향곡을 발표했다고 하기에 CD를 구해 들어봤다.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현대음악의 최전선에서 늘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 온 그의 8번 교향곡은 전편이 독일의 시를 텍스트로 한 합창교향곡. 우리에게도 익숙한 괴테, 릴케, 헤세, 아힘 폰 아르님 등의 시들이다. 이 교향곡의 맨 처음에 나오는 시가 ‘나는 마치 인생의 가장자리와 같은 숲의 그늘 속에 서 있다’로 시작되는 아이헨도르프의 ‘밤’이다. 나도 젊은 대학생 시절 독문학 강의시간에 아이헨도르프의 바로 이 시에 탐닉했던 생각이 떠올라 새삼 우리가 양의 동서를 초월해서 동시대를 살았구나 하는 감회에 젖었다.

대학에 입학했던 1950년대 초라면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에 태어난 우리는 아직 10대 말의 젊은이. ‘인생의 가장자리 같은 밤’이 아니라 먼동이 트는 아침녘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쪽에선 피비린내 나는 동족 전쟁의 와중에서, 그리고 저쪽에선 히틀러에서 스탈린으로 이어지는 전체주의의 억압 속에서 아침의 어둠을 저녁의 어둠처럼 느낀 한계상황 속에서 ‘잃어버린 청춘’을 살고 있었다.

한국과 폴란드 너무 닮은 역사

그로부터 50여 년. 우리는 그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맞고 겪고 당하고 견디고 싸우고 이기고, 그리고 이룩해냈다. 한국은 동족 전쟁을 치른 물리적 심리적 폐허 위에서 벌거벗은 산야를 녹화하고 산업화를 통해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룩하고 맨주먹으로 군부통치를 종결시켜 정치를 민주화시켰다. 한편 폴란드는 아우슈비츠의 악몽과 소비에트 체제의 일상을 이기며 자유노조 솔리다르노시치(연대)의 10년에 걸친 사투(死鬪) 끝에 소비에트 체제의 총체적 붕괴와 동유럽 민주화의 대혁명에 선편을 친 위업을 이룩했다.

“주여,…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하였습니다.”(릴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1930년대만 하더라도 지도상에는 한국이라는 나라도, 폴란드라는 나라도 없었다. 폴란드는 히틀러 나치 독일의 가장 처절한 인종청소의 대량학살 무대가 됐고 한국은 히틀러의 동맹국이던 ‘2류 제국주의 국가 일본’(에릭 홉스봄)의 식민지로 태평양전쟁에 인명과 물자를 강제공출 당하고 있었다.

1945년 한국과 폴란드는 다같이 외세의 지배에서 해방되고 국권을 찾는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다시 폴란드는 45년에 걸친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압제 속에서 살아야 했고 한반도는 국토가 분단돼 미소의 영향하에서 수립된 남북 두 정권의 동족 전쟁을 치렀다. 그 뒤를 잇는 한국의 군부 정권과 개발독재체제. 우리가 마침내 거기에서도 해방되면서 문민 민주 정부를 쟁취했을 때 폴란드는 1970년 그단스크 노동자 봉기로 시작된 장장 20년에 걸친 반체제 저항투쟁의 지구전 끝에 마침내 폴란드뿐만이 아니라 동유럽 전역에 걸친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와 자유화 혁명을 성취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해방’.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 지구상에서 해방의 파토스를 폴란드 민족처럼 우리와 같이 공감할 수 있는 민족이 또 있을까. 1990년대 초 광복절을 기념하는 작품을 정부에서 세계적인 작곡가에게 의뢰하고 싶다 하기에 나는 서슴지 않고 폴란드의 펜데레츠키를 추천했다. 그의 교향곡 5번 ‘코리아’ 탄생의 배경이다.

펜데레츠키의 또 다른 명작 ‘폴란드 진혼곡’은 1980년 폴란드 민주화의 기수 자유노조 ‘솔리다르노시치(연대)’가 1970년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음악을 위촉 받으면서 작곡이 시작됐다. 이 나라의 자유화 과정에는 나치 시대부터 소비에트 시대까지 일관해서 저항운동의 중심에 가톨릭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엔 나치에 대한 레지스탕스에 성직자의 4분의 1이 살해되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훗날의 요한 바오로 2세와 같은 고향인 펜데레츠키는 초기 걸작 ‘누가 수난곡’에 이어 수많은 교회의 전례음악을 작곡했다. 그런데도 그 음악은 단순히 영원을 지향하는 종교음악에 머물지 않고 그가 산 시대, 폴란드와 유럽의 역사가 그 속에서 숨쉰다. “그에게는 수난의 사상이 인간적인 것으로 변이되고 있다”는 독일 평론가 슈투켄슈미트의 지적은 적확하다. 펜데레츠키의 창작에는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상위개념으로서 정치적 참여의 정신’이 굽이치고 있다.

펜데레츠키 내한공연에 기대

그사이 우리도 나이를 먹었다 “생명의 나무에서 잎이 하나씩 떨어지네.”(헤세) 그래서 우리도 “언제부터인가 눈앞에/만물의 변화가 보이네”(릴케) 하리만큼 세상을 달관하게도 됐다. 성경의 언어, 라틴어 가사로 된 펜데레츠키의 음악에선 시간 속의 역사가 영원 속에 축성되고 있다. 이제 그가 처음으로 세속(독일)어의 시를 노래한 8번 교향곡에선 인생무상의 저편에서 지상의 것이 영원으로 축성되는 것일까. 모레 예술의 전당에서 펜데레츠키가 지휘하는 교향곡 8번을 들어봐야겠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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