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별 장소는 서대문 밖 ‘반송방’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7일 03시 00분


코멘트

서울학연구소 학술대회

노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나 ‘대전 부르스’에서 알 수 있듯 근대 한국인에게 이별을 상징하는 대표적 장소는 기차역이다. 조선시대는 어땠을까?

김지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통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최근 서울학연구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18세기 문화·예술공간으로서의 반송방’에서 “조선시대 이별의 장소는 서울 돈의문(서대문) 밖에 있던 반송방(盤松坊)”이라고 밝혔다.

발표문에 따르면 서대문 밖과 현 독립문 부근인 한양 반송방은 한성부 산하의 ‘성중오부(城中五部)’에 속했다. 이곳에 경기도를 관할하는 경기감영, 말을 빌려주던 고마청(雇馬廳),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모화관 등이 있었다. 반송방이라는 이름은 모화관 근처에 그늘이 수십 보에 이르는 반송(盤松)이 조선 초기까지 있었다는 데서 나왔는데, 그 앞 연못에 연꽃을 가꾸었다고 한다.

반송방은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의주로의 시작점으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이 지인들과 작별하는 장소였다. 또한 바로 북쪽의 무악재도 경기 북부와 평안도로 가는 길목이어서 수령이나 목사, 관찰사로 제수돼 떠나는 이들의 이별 공간이었다.

“벗과의 이별에 원유가를 부르는데(故人別我歌遠遊)/어찌 은주발 한 쌍으로 전송할 수 있을까(何以送之雙銀)….”

조선 전기 문신 서거정(1420∼1488)이 이별을 노래한 시 ‘반송송객(盤松送客)’이다. 서거정은 ‘한도십영(漢都十詠)’을 통해 한양의 명소 열 곳을 뽑고 흥취를 노래했는데 그중 한 곳으로 반송방을 꼽았다. 김지현 전임연구원은 “반송방이 10경에 꼽힌 건 뛰어난 경관보다는 이별을 대표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고, 이후에도 많은 시에서 이별의 상징으로 등장한다”며 “18세기 이후에는 당파를 초월해 시인 묵객들이 시회(詩會)를 즐기는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변모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서울학연구소 학술대회#반송방#조선시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