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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신광영]집까지 따라온 남자가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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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신광영]집까지 따라온 남자가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입력 2019-06-25 03:00수정 2019-06-25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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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 피의자 조모 씨(30·구속)는 여성이 간발의 차로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자 스마트폰 손전등을 켰다. 도어록에 묻은 지문을 보고 비밀번호를 알아내려 했다. 그날 새벽 여성은 현관문 너머의 낯선 남성이 비밀번호를 눌러대는 소리를 홀로 들었다.

23일 광주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김모 씨(39·구속)는 20대 여성을 집까지 뒤따라가 문 자물쇠를 여는 것을 훔쳐본 뒤 쪽지에 자물쇠 비밀번호를 적었다.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여성이 잠들면 문을 열고 들어가 성관계를 맺으려 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남성이 여성을 뒤따라가 집에 침입하려고 한 사건은 그동안 숱하게 있었다. 하지만 이를 중대한 범죄로 보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신림동 사건’ 현장 폐쇄회로(CC)TV에 담긴 아찔한 순간을 목격하고 나서야 여성들의 오래된 공포를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피해자의 고통은 남성이 문을 열지 못하고 되돌아간 뒤 비로소 본격화된다. ‘그놈’은 여성의 집 동·호수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처였던 집은 그놈이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범행 예정지’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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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길을 걷거나 지하철을 타는 등 평범한 일상의 와중에도 표적이 되는 경험을 한다. 이런 일상성은 같은 사건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공포로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악몽이 곧 현실이 돼 집 근처에서 가해 남성과 마주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때도 별다른 신체 접촉이 없는 한 처벌하기 어렵다. 그 결과 가해자는 활보하고 피해 여성은 멀리 이사를 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반복된다.

지난해 3월 40대 남성이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여성을 뒤따라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탔다. 그는 여성이 자기 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재빨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도어록이 잠기기 전 문을 열어젖혔다. 현관에서 낯선 남성과 맞닥뜨린 여성은 너무 놀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성은 여성을 강제추행한 뒤 달아났다.

얼마 뒤 경찰에 붙잡힌 이 남성은 부인과 자녀를 둔 금융기관 간부였다. 법원은 “주거가 일정해 도주 우려가 없다”며 가해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법원은 3월 1심 판결에서도 “추행이 중하지 않고 가족들이 선처를 탄원하는 등 사회적 유대관계가 분명하다”는 등의 이유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피해 여성은 가해자가 또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결국 집을 옮겼다. 그는 사건 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고 있다.

경찰이 ‘신림동 사건’ 피의자 조 씨를 강간미수 혐의로 구속한 것을 두고 무리한 법 적용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조 씨가 성폭행을 시도한 것으로 의심되긴 하지만 강간을 위한 ‘실행의 착수’가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실행의 착수’ 여부가 모호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성이 이미 심각한 피해를 입은 이상 처벌의 공백을 방치할 수는 없다.

최근 검거된 주거침입 범죄자들은 대부분 스토킹이나 성추행 등 동종 전과를 여러 건 갖고 있다. 잠재적 성범죄자들이 서서히 수위를 높여가며 중범죄를 저지를 때까지 우리 법체계가 이들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행의 착수’가 확인되지 않았더라도 엄중히 책임을 묻는 제도는 여러 분야에서 시행되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자가 시험을 치르는 동안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가 발각되면 그 자체로 부정행위로 간주된다. 음주 측정에 3회 이상 불응한 운전자는 면허취소 등 만취운전과 동일한 수준의 처벌을 받는다.

현행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남성이 여자 화장실이나 탈의실, 목욕탕 등 에 침입하는 행위를 처벌 대상으로 본다. 예전에는 건조물 침입 정도로 여겨 훈방했지만 몰카 촬영·유포 범죄의 피해가 워낙 심각해 법이 개정됐다. 여성을 뒤따라가 주거 침입을 시도하는 행위 역시 피해의 중대성을 고려하면 성범죄를 위한 ‘예비·음모’로 간주해 처벌하는 법을 도입할 때가 됐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성폭력#성폭력 특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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