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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난 거짓기사 쓴 적 없지만 日우익 집요한 협박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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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난 거짓기사 쓴 적 없지만 日우익 집요한 협박 이어져”

장원재 특파원 입력 2015-12-28 03:00수정 2015-12-28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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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안부 증언 日에 첫 보도 우에무라 다카시 前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우익들의 공격으로 대학 임용이 취소되고 가족들까지 살해 협박을 받았던 2년간의 경험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우익들은 월급 5만 엔(약 49만 원)의 비상근 강사 자리에서 그를 내쫓기 위해 대학 측에 1200건이 넘는 e메일을 보내고 항의 전화도 500통이나 걸었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은 입사 10년 차인 일본 기자에게 다가온 행운의 특종이었다.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1991년 8월 11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오사카(大阪)판 사회면 톱으로 보도했다. 그는 ‘한국 내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세상에 처음 알린 기자’가 됐다. 그때는 몰랐다. 그 순간이 기나긴 악몽의 시작이라는 것을. 》

우에무라 전 기자는 보도 후 일본 우익으로부터 ‘일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끊임없는 협박과 공격에 시달렸다. 지난해 초 신문사를 떠나 고베(神戶)의 한 여대 교수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익들은 250통 이상의 전화와 e메일을 대학에 보냈다. 교수 임용은 결국 취소됐다.

불길은 그가 2012년부터 비상근 강사로 재직하던 삿포로(札幌)의 호쿠세이가쿠엔대에도 옮겨 붙었다. 지난해는 여론의 힘으로 1년간 계약이 연장됐지만 대학 측은 올해 ‘재계약이 어려울 수 있다’는 방침을 통보했다.

그는 마침내 한국 가톨릭대 초빙교수 자리를 받아들였다. 가족들까지도 살해 협박에 시달리면서 2년 동안 고난의 시간을 보냈던 우에무라 전 기자. 16일 동아일보 도쿄(東京)지사에서 그를 만났다.

―1991년 위안부 증언을 처음 보도한 경위를 설명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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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부터 피해자 증언을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취재했다. 한국에 2주 동안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별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이듬해 서울지국에서 ‘위안부 피해자가 증언을 시작했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한국에 갔다. 윤정옥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공동대표를 만나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건네받았다. 당시 본인은 기자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 직접 인터뷰는 못했다. 그래도 최초 증언인 만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기사를 썼다. 보도 3일 후 김 할머니가 직접 기자회견을 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김 할머니의 증언은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 현안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김 할머니는 1991년 12월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하지만 이듬해 방위청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위안부 설치 및 운영에 관여한 자료가 발견되는 등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잇달아 나왔다. 결국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은 ‘강제성’과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고노담화를 발표했다.

―다른 일본 언론도 크게 보도했는데 왜 당신만 타깃이 됐나.

“아사히신문 기자이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은 위안부 등 식민지 치하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열심히 보도해 왔다. 이를 두고 ‘일본의 체면을 깎는다’며 거부감을 가진 우익들이 있다. 두 번째는 내가 기명 기사로 위안부 피해자의 첫 증언을 보도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부인이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장모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전후(戰後) 보상을 요구하며 소송을 냈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임 회장이다. 그러다 보니 ‘장모를 위해 일본 국익을 해치는 기사를 썼다’는 식의 말이 나돌았다. 결혼(1991년 2월) 전부터 위안부 문제를 취재해 왔는데도 말이다.”

―기사에서 주로 강제노동을 당했던 정신대와 성적 학대에 시달린 위안부를 혼동했다는 비판이 있다.

“기사에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쓴 건 맞지만 그 당시 한국에서도 그랬고, 일본에서도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불렀다. 그리고 일본군이 위안부 피해자를 강제연행한 것처럼 보이도록 기사를 썼다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다. ‘속아서 갔다’고 썼을 뿐이다. 오히려 (나를 공격하는) 산케이신문이 두 번이나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을 썼다. 문제의 본질은 강제연행 여부가 아니라 위안부가 된 후 끔찍한 인권 침해를 당했다는 것이다.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해 나를 공격하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

한국에서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불렀던 것은 정신대로 공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며 속여 위안소로 끌고 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사히신문이 자체적으로 만든 ‘위안부 보도 제3자위원회’는 지난해 말 보고서를 통해 ‘우에무라 전 기자가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했거나, 장모를 위해 기사를 쓴 적이 없다는’ 취지의 결론을 내렸다.

―우익들의 협박은 언제 시작됐나.

“1992년 4월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도쿄기독교대 교수가 시사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에 ‘중대한 사실 오인’이라는 표현을 쓰며 내 기사를 비판했다. 이후 아사히신문 홍보부에 항의 전화가 걸려오는 등 공격이 이어졌지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2월 주간지 슈칸분슌(週刊文春)에서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 기자가 여대 교수로’라는 기사를 게재하면서 임용 예정이던 대학에 공격이 시작됐다. 대학은 신문과 달리 여론에 약하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일본 우익들은 그의 가족도 공격했다. 2월 대학에 배달된 편지에는 그의 고등학생 딸의 실명과 ‘반드시 죽인다. 몇 년이 걸려도 죽인다. 어디로 도망쳐도 죽인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인터넷에는 집 전화번호가 공개됐고 딸의 사진과 함께 ‘자살할 때까지 몰아붙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글이 게재됐다.

―협박은 어느 정도였나.

“지난해 계약 연장 여부가 문제가 되자 대학에 협박 e메일과 전화가 쇄도했다. 집에도 협박 전화가 걸려 왔다. 딸의 실명과 사진이 노출되고 협박장이 도착한 뒤부터 딸의 등하교 때 경찰 경호가 시작됐다. 경찰차가 바로 뒤에 따라가니 딸이 눈치를 채고 부담스러워해 ‘조금 거리를 둬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전 딸이 여자 변호사와 대화할 때 눈물을 펑펑 쏟더라. 딸까지 공격을 받으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직도 순찰차가 가끔 집 근처를 돌고 있다.”

―얼굴이 많이 알려졌는데 불안하지 않나.

“6월 신고베 역에서 신칸센 표를 사고 있었다. 한 남성이 다가와 ‘우에무라 다카시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갑자기 ‘매국노’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매국노가 아니다’라고 답하자 가 버렸다. 길거리에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처음이라 놀랐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날조 기자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신문기자에게 있어서 날조 기자라는 별명은 사형선고와 같다. 나는 날조 기자도 아니고 허위 사실도 쓴 적이 없다. 요즘 아내는 ‘무료로 유명해지니 좋은 거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지원 단체들의 도움도 받고 있어 진실이 점차 알려지고 있다. 대학에 오는 e메일이나 전화도 처음에는 항의 성격이 많았지만 나중에는 응원 내용이 더 많아졌다.”

지난해 그의 거취는 일본 사회에서 뜨거운 논란거리였다. 뉴욕타임스 등 해외 언론도 대서특필했다. 호쿠세이가쿠엔대가 재계약 연장에 난색을 표한 이후 때마침 한국 가톨릭대의 초빙교수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이 대목에서 “호쿠세인가쿠엔대가 협박에 무릎을 꿇었다고 보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우익들의 협박이 일단락된 상황에서 스스로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는 얘기였다.

―가톨릭대에 가는 경위를 설명해 달라.

“호쿠세이가쿠엔대와 가톨릭대 사이에 학생 교환프로그램이 있다. 내가 가르치던 과목 ‘국제교류특별강의’도 원래 가톨릭대에서 온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절반가량이 가톨릭대 학생이다. 4년 동안 학생을 가르쳐 왔고 그중 일부가 한국에 돌아가 내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 그런 영향인지 몰라도 10월 말 ‘한국에서 가르쳐 보지 않겠느냐’는 가톨릭대의 제의를 받았다. 우익들의 협박도 줄었고, 비상근강사에서 초빙교수가 되는 것이니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꼭 언급하고 싶은 제자가 있다고 했다. 9월 18일 자 동아일보 오피니언면에 ‘우에무라 교수를 지켜야 한다’는 글을 썼던 강명석 씨(가톨릭대 일어일문학과 4학년)였다. 우에무라 교수의 수업을 들었던 강 씨는 지난해 12월 유학생 스피치 대회에서 ‘의견이 다르다고 대학을 위협하고 교수와 학생을 공격하는 것은 유감’이라며 그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 측에서 ‘위험할 수 있으니 내용을 고치라’고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강 씨는 한국에 돌아온 뒤 가톨릭대에서 그를 지지하는 학생 917명의 서명을 받아 일본에 전달했다. 우에무라 전 기자는 “그런 용기 있는 학생을 제자로 둘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 2월에 ‘우에무라 때리기’ 경험을 쓴 책이 출간된다. 날조라는 딱지를 붙인 니시오카 교수 및 슈칸분슌 등과 진행 중인 재판도 계속된다. 170명의 변호사가 자발적으로 대리인을 맡았다. 아내와 함께 서울에 온 뒤에도 재판이 진행되는 도쿄와 삿포로를 오가는 생활을 해야 할 것 같아 저비용 항공을 알아보고 있다. 가톨릭대에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형식으로 한일 교류 역사를 가르칠 생각이다.”

우에무라 전 기자가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처음 소개한 1991년 8월 11일 아사히신문 오사카판 사회면.
―1991년 위안부 기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 기사의 무거움을 다시 느끼고 있다. 사실 1991년 이후에는 위안부 관련 기사를 거의 쓰지 않았다. ‘장모를 위해서 기사를 쓴다’는 우익들의 공격을 받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 서울특파원 임기(1996년 12월∼1999년 8월) 중 김학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지만 간단한 소식만 전했을 뿐 묘소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올 8월 마음을 고쳐먹고 한국에 다녀왔다. 나는 역사의 큰 전환점에 서 있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위안부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하겠다고 각오했다. 그런 의미에서 김학순 할머니 묘소에도 다녀오고 나눔의 집도 갔다 왔다. 앞으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글을 쓰면서 한일 간 역사 화해에 도움이 되는 길을 찾을 것이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우익#일본#위안부#우에무라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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